오랜만에 재계 총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기업 회장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기회는 대통령 초청 행사가 아니라면 그리 많지 않다. 그 적은 기회 중 하나가 바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단 총회이다. 지난 10일(목) 전경련은 허창수 회장(GS 회장) 취임 후 첫 회장단회의를 열었고, 이 자리에 많은 재계 총수들이 모습을 드러내 전경련의 새로운 출발을 함께 했다. 회장단은 이날 회의를 통해 국민소득을 끌어올리고 정부의 동반성장과 물가안정 정책에 협력하기로 하는 한편, 회원사 21명 회장단 중 역대 최다인 17명이 참석하는 등 성황을 이뤄, 그동안 다소 힘을 잃었던 전경련에 다시 위상을 찾는 계기를 마련했다.

 



10일 전경련 회장단 만찬을 주관한 현대차 정몽구 회장은 이 자리에서 "허창수 회장을 중심으로 전경련이 합심해 국가 경제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며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한 건배를 제의했다. 새 수장인 허창수 회장의 전경련에 힘을 실어주려는 정몽구 회장의 배려가 돋보이는 발언이다.

 

잃어버린 위상을 찾아서

 

이번 회장단 회의는 지난해 7월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7개월만에 회장 공석이 채워지고 열린 첫 회의로, 오랜만에 많은 재계 총수들이 참석해 무게감을 더했다.

 
구본무 LG 회장은 회사 내부 사정으로 불참했지만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최태원 SK 회장, 정준양 포스코 회장, 강덕수 STX 회장, 현재현 동양 회장, 이웅렬 코오롱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등 17명이 회의에 참석해 그야말로 내로라 하는 기업 총수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특히 대통령 초청 행사가 아닌 전경련 정례 회장단 회의에 이건희, 정몽구, 최태원 세 회장이 함께 모인 것은 2005년 6월 이후 5년 9개월만의 일로, 때문에 더욱 관심을 모았다.

 
회의가 열린 서울 남산 하얏트호텔에는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고, 외국인 관광객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무슨 일인가 구경을 할 정도였다.

 
재계 총수들이 이처럼 많은 참석률을 보인 데에는 오랜 공석 끝에 전경련 회장 자리가 채워졌고, 김우중 대우 회장이 24~25대 전경련 회장을 맡은 이후 12년 만에 재계 서열 10위권 이내 그룹 회장이 전경련을 이끌게 된 만큼, 그동안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힘이 빠졌던 전경련에 다시금 힘을 실어주자는 의지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총수들이 모인 것을 두고 전경련에서 '허창수 호'의 출범을 계기로 뭔가 적극적으로 하려는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국가를 위해 대기업들이 좀 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 총수들이 뜻을 모았으리라는 것이다.

 
4년 만에 회장단 회의에 모습을 드러낸 이건희 회장이 회의 참석 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동반성장위원회 등 정부가 추진하는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한 것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전경련의 위상을 다시 찾기 위한 신호탄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대기업의 초과이익을 중소기업에 나눠주자는 의미로 내건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들어보지도 못한 말"이라며 "이해도 안 가고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누가 만들어 낸 말인지 사회주의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자본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공산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모르겠다는 말"이라고 원색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제 역할 충실히

 

그동안 전경련은 회장 부재 등의 문제로 정부정책을 재계에 전달하는 선에서 머물러 '정부와 재계 중개자'라는 본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들어왔다.

 

하지만 허창수 회장의 취임과 재계 총수들의 협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강도 높은 발언 등을 계기로 그간 실추됐던 전경련의 위상이 조금씩 회복조를 보일 것으로 재계는 받아들이고 있다.

 
평소 말을 아끼기로 유명한 이 회장의 발언도 단순한 비난의 목적이 아니라 전경련과 재계의 입장을 대표해 따끔한 일침을 놓은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를 계기로 전경련이 앞으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허창수 회장도 나름대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며 전경련의 제 역할을 해나가려 노력하고 있는 모양새다. 전경련은 지난해 정부가 재계의 협조를 구했던 '통일 준비 비용'에 대해 최근 '협조 불가' 방침을 밝혔다.

 
또 지난 3일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된 후 첫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허 회장은 전경련 임직원들에게 "회원사들이 만족할 때까지 회원사들의 기대 이상으로 일하라"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경련 본래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허 회장의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처럼 재계의 구심점 역할을 맡아 이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이를 정부에 전달하는 역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자 하는 허창수 회장과 전경련의 앞으로의 행보에 재계의 많은 이목이 집중하고 있다.

 

 

"건강한 자본주의와
창의적 시장경제"

 

10일 전경련 회장단 회의는 한 시간여 동안 비공개로 진행된 가운데 전경련을 비롯해 재계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초과이익공유제와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논의된 내용이 없었다고 한다. 정병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회의가 끝난 후 발표문을 통해 "초과이익공유제와 관련해서는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의) 아이디어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나온 게 없는 만큼 전경련에서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논의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반성장위원회가 구체적인 청사진이 나와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향후 전경련 차원에서의 대응방안이 나올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전경련은 또 '건강한 자본주의와 창의적 시장 경제'라는 이념을 바탕으로 203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 10만 달러 시대를 여는 '우리 경제 희망 100년에 관한 비전'을 수립키로 했다. IMF의 자료를 검토하니 경제10위 국가에 들려면 경제성장률 5%에 10만달러 소득을 갖춰야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이와 함께 세계 10대 경제강국 시대를 여는 청사진을 만들어가기로 하고 정부의 동반성장과 물가안정 정책에 협력하기로 다짐했다.


회장단은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이 민생경제에 충격을 주지 않도록 물가안정에 정부와 힘을 모으기로 했다"며 "최근 글로벌 경쟁은 단순히 회사 대 회사 간의 경쟁이 아니라 국가 대 국가, 기업군 대 기업군 간 경쟁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 만큼 우리 경제 전체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중소협력업체와의 동반성장에도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병철 부회장은 "(정운찬 위원장이) 동반성장지수를 만들겠다고 하는데 이래서 잘했다 하는 식으로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며 압박보다 칭찬을 바라는 듯한 말을 덧붙였다.

 
회장단은 또 전경련이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경제단체로 발전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이를 위해 시민사회, 노동계, 청년층 등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 이들의 의견을 경청하기로 했다.

 
한편 첫 회의에서부터 한껏 힘을 실은 전경련의 '허창수 호'가 앞으로 초과이익배분제뿐 아니라 올해 추진할 사업 중 상속세와 조세 제도 개선안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할지도 재계의 관심이 모아지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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