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내선일체와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 식민지의 모든 국민들에게도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신사는 일본의 고유 민간종교인 신도의 사원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국민 통합을 위해 전국에 신사를 세우고 이 신도를 천황제 국가의 기본 정신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당시 살아있는 천황을 신격화해서 국민의 정신적 통일뿐만 아니라 군국주의 침략 정책 및 식민지 지배에도 이용했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대동아공영권 형성을 내세우며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위하여 신사에 대한 참배를 정책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했다. 신사참배는 국민 교육의 기본 요건으로 모든 학교에서 강제로 시행되었는데, 1935년 11월 평양 기독교 학교의 교장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학교를 폐교 조치하는 강경한 정책을 실시했다 그리하여 평양의 숭실 및 숭의 등 일부 학교가 폐교의 길을 택하였으나 대부분의 학교는 이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의 황민화 운동이 더욱 고조되어 일제는 교회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고 여겼으므로 이것은 신앙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었다. 그래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고, 2,000여 명이 투옥되었으며, 30여 명이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이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개인의 신앙과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으며, 동시에 민족 독립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일본제국의 식민정책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운동으로 간주하고 여기에 가담한 이들을 검거해서 처벌하였다.

우리는 신사참배에 참여한 사람들을 현재의 관점에서 정죄하고 비난하기 쉽다. 그러나 당시 삼엄한 전시체제 아래에서 식민지 조선의 주민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행동이었다. 또한 그것은 가족의 희생, 교회의 폐쇄, 학교의 폐교를 감수하겠다는 결단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순교자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강력하게 반대하여 7년간 옥고를 치르던 중 1944년 4월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죽음조차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강철같은 의지의 소유자라서 그런 고결한 자세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잠시 출옥했을 때 행한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그는 '죽는 것이 두렵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 그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아무리 혹독한 고문이라도 총이나 칼로 금방 죽여 준다면 버틸 수 있겠는데, 10년, 20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기간의 고난이라서 너무나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 그것도 피할 길이 없는 고난이 아니라 눈감고 고개만 한번 숙이면 그 고통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기에 그 유혹을 떨치기가 너무나 힘들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늙으신 어머니와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어린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뒤흔드는 것이었다. 노모와 어린 자녀들의 눈물이 자신을 순교의 길에서 돌아서게 할까 봐 괴로워하며 기도하는 모습이 얼마나 애처로운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강요함으로써 아무도 이를 피할 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신사참배는 우리 민족에게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한국의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역사 앞에서 고백하는 최후의 시험대가 되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행위는 자신이 일본 천황의 백성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고백이며, 일본제국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유원열 목사·전 백석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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