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난 강영우 박사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생일 때 눈을 축구공에 맞아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충격에 빠진 어머니께서 뇌졸중으로 돌아가시고, 누나마저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불우한 시각장애인 소년 강영우는 1962년 평생 그의 등불이 되어 줄 아름다운 여대생 석은옥 님을 만났다. 맹학교의 자원봉사자로 만난 그녀는 소년 강영우를 돌보는 누나로 출발하여, 청년 강영우의 연인으로, 그리고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로 자리바꿈하면서 강 박사의 곁을 지켰다.

1972년 시각장애인 학생 최초로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강영우는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시각장애가 교육부 유학시험의 결격사유가 되었기에 법을 개정하는 등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극적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1976년 강영우는 피츠버그대학교에서 교육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강영우 박사는 1977년부터 22년 동안 미국 인디애나 주정부의 특수교육국장, 노스이스턴 일리노이대학교 특수교육학 교수 등으로 재직하였다. 2001년 그는 W. 부시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로 임명되어 6년간 일하면서 미국의 5,400만 장애인을 대변하는 직무를 수행했다. 또한 그는 유엔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 그리고 루스벨트재단의 고문을 맡아 인류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강 박사는 자녀들에게도 멋지고 훌륭한 아버지였다. "우리 아빠는 운전도 못하고, 야구도 못하며, 자전거 타는 것도 못 가르쳐줘요." 어린 아들이 이처럼 낙담할 때, 강 박사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어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맹인인 아빠가 눈뜬 엄마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도 있단다. 엄마는 불을 끄면 너한테 그림동화도 못 읽어주지만, 아빠는 이렇게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서 (점자로) 성경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잖니?"

강 박사는 2011년 10월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차분히 임종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는 그의 마지막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 책에서 강 박사는 장애가 자기에게는 축복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오늘과 같이 훌륭한 성공을 이룬 것이 아니라 '장애를 통하여'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장애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장애는 나에게 축복이었다. 나는 장애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책으로 쓸 수 있었다. '장애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장애를 통하여'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UN과 백악관을 무대로 활동할 수 있었다."

강 박사는 그의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며 지인들에게 "슬퍼하지 말아달라."는 위로와 감사의 메시지를 담은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40년 전 장학금을 받았던 국제로터리재단에 평화장학금으로 25만 달러를 기부해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임종을 앞둔 강 박사는 가족들에게도 따뜻한 편지를 남겼다. 두 아들에게는 '해 보기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자신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자라준 것이 고맙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항상 함께할 것이기에 슬픔도, 걱정도 없다고 썼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참으로 애절한 감사의 메시지를 남겼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날개 없는 천사였습니다. 나의 어둠을 밝혀주는 촛불,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작별 인사인가? / 유원열 목사·전 백석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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