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이란 자기와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나 공동체를 뜻하지만, 이웃사촌이라는 말처럼 사회적 거리의 가까움도 포함한다. 우리나라의 전통사회에서 이웃은 마을 공동체의 생활을 위해 강한 결속력을 지닌 구성원으로서 그 관계는 지극히 친밀하고 정겨운 성격을 띠었다. 마을 안에서도 인접한 이웃집은 더욱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농번기가 되면 이웃 사람들은 '품앗이'를 통하여 노동력을 교환하고, 금전, 농기구 등을 서로 빌려주거나 공동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경조사에는 서로 일손을 도와주고 물품으로 부조도 하였으며, 별미 음식을 만들면 으레 이웃이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러나 도시생활은 이와 조건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오늘날 도시인들의 이웃관계는 급격하게 변화되었다. 도시에서는 시민들의 공동체 의식이 약하고, 개인적인 삶과 익명성이 강조되기 때문에 친밀한 이웃관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도시생활을 하는 현대인들에게도 이웃관계가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도시에서도 학교, 직장, 복지기관, 그리고 동호회 등을 중심으로 사회적 교류를 통해 친밀한 이웃관계가 유지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율법학자가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예수께 질문을 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 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갔다. 레위 사람도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그의 상처를 응급 치료한 후, 자기 당나귀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다음 날 그는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부탁하며.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고 묻는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가 묻지 말고, 스스로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 묻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닌가? 예수께서는 이 비유에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당시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지도자들이었다. 이에 반하여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이 미워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이었다. B.C.721년 북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자 이방인들이 그 땅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생겨난 혼혈족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혼혈인이자 이교도라고 멸시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마리아 사람을 선한 이웃의 모델로 삼은 것이다.

예수께서 말한 참된 이웃은 이와 같이 우리 생활환경 가까이에 있다. 우리의 손이 미치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존재가 우리의 진정한 이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주변에는 항상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세계 곳곳에서 외국인 유학생과 근로자들이 우리의 새로운 이웃으로 들어와 있다. 나그네들은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낯선 환경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우리가 이처럼 곤경에 처한 외국인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따뜻한 이웃,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온 세계 모든 나라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된 이웃인지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매일 아침 스마트폰으로 외국인 이웃 친구들에게 한국어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면 우리 한국에 있는 외국인 친구들뿐만 아니라 고국으로 돌아간 친구들도 자기 나라에서 응답 메시지를 보낸다. 최근에는 프랑스 파리에 사는 새 이웃이 나에게 한국어 회화 도움을 요청하여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다. 사이버 공간이 열리면서, 우리는 인터넷을 통하여 지구촌 시대 새로운 이웃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것이다. / 유원열 목사·전 백석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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