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곳곳에서 '한류 열풍'이라는 말을 자주 들을 만큼 우리 한국의 문화가 세계 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우리나라가 짧은 기간에 이룩한 경제 성장과 민주화, 그리고 최근 스포츠, 음악, 영화 등 문화 예술 분야의 성과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지난 10월 29일 서울의 이태원 좁은 골목길에 몰린 인파로 인해 156명의 젊은이들이 생명을 잃는 엄청난 사고가 발생했다. 참으로 가슴 아프고 비통한 일이다. 코로나19 이후 첫 자유로운 축제를 즐기려고 모인 젊은이들이 비좁은 공간에서 압사사고를 당해 고귀한 생명을 잃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사망자 명단에는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이란, 러시아, 중국, 미국, 일본, 베트남, 태국, 스리랑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호주, 노르웨이,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14개국 26명의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귀한 젊은이들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 자책으로 우리 온 국민이 깊은 슬픔에 싸여 있다. 모든 사람의 자유가 소중하다. 그러나 나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공동체의 질서가 필요하고,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개인의 자유가 다시 제한을 받아야 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제한과 통제가 적절한지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자유는 어렵다. 공공의 질서를 유지하며 자유를 마음껏 행사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렵다. 그러기에 고대 그리스의 현인 솔론은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름답고 가치 있는 모든 일은 참으로 이루기가 어려운 것이다.

젊은이들이 축제를 즐기려고 자발적으로 모인 인파로 인해 일어난 이 사고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책임자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법원은 대개 그 위험을 가장 빨리 인지하고 회피할 수 있는 당사자에게 그 책임을 지워서 사회의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택하곤 한다. 물론 자유는 자율의 원칙, 곧 자기책임의 원칙 아래에서 누리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기본으로 전제되지 않으면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로 인한 부주의가 증폭되고, 자유와 권리가 정부의 통제에 의해서 끊임없이 침해되는 상황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우리는 이런 사고에 대하여 정부 당국의 책임을 묻는다. 정부는 국방, 치안, 소방, 방재, 방역 등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사고가 일어날 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수만 명 인파가 모이는 특별한 상황의 위험에 미리 대비하지 못하고, 이처럼 큰 사고를 예방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 청년들이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외국인들과 함께 그 좁고 가파른 골목길에 쓰러져 목숨을 잃는 참사가 발생했으니, 이처럼 큰 사고의 위험을 아무도 미리 인식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일인가?

민주주의는 참으로 어렵다. 공동체가 자유와 질서를 동시에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십만 명의 시민이 한정된 공간에서 어떻게 질서를 유지하며 축제를 즐길 수 있는가? 이태원 참사 꽃다운 젊은이들의 고귀한 희생 앞에서. 민주주의 나라 우리 대한민국은 이제 모든 시민이 안전하게 질서를 지키며 자유로이 축제를 즐길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2002년 서울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늦은 밤 서울 광장과 길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을 외치며 질서정연하고 아름다운 응원문화로 온 세계를 감동시키지 않았는가? 우리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다시 자유와 질서의 새로운 길을 열고, 한 차원 승화된 아름다운 문화를 창조하리라 믿는다. / 유원열 목사·전 백석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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