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제국의 슬픈 흔적을 찾아서

[월요신문 김지수 기자 정리]100여 년 전, 역사상 가장 짧은 역사의 제국이 한반도에 생겼다가 사라졌다. 대한제국(1897~1910)은 일본과 중국, 러시아라는 세계 제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을 위해 탄생했으나, 결국 15년을 버티지 못하고 그 수명을 다했다. ‘조선총독부’를 세운 일제는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지금도 대한제국의 흔적은 서울 한복판에 남아 있다.

   
▲ 정문에서 바라본 황궁우

풍전등화의 조선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대한제국
비극을 품고 있는 덕수궁…어두운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황궁우를 찾는 것은 쉽고도 어렵다. 서울 택시 기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조선호텔의 정원에 있으니 찾기 쉽다 말할 수 있으나, 황궁우가 어떤 곳인지 모른다면 보고도 그저 ‘호텔 정원의 고풍스런 정자’쯤으로 보고 무심히 지나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변의 높은 빌딩 사이에 외로이 서 있는 모습이지만, 이곳은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하늘에 제사 지냈던, 위풍당당한 모습의 환구단이 있던 곳이다. 황궁우는 환구단의 부속 건물 중 하나였다.

고종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낸 곳, 황궁우

조선 땅에 처음 환구단이 세워진 것은 지난 1897년, 아관파천에서 돌아온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던 해였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를 잃고, 그 자신도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고종은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에서 1년 넘게 머물며 정사를 보았다. 하지만 아관파천 동안 조선의 각종 사업권들은 열강의 손으로 하나둘 넘어갔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풍전등화의 조선은 스스로 제국을 선포했다. 남을 침략하기 위한 제국이 아니라, 제 한 몸을 지키기 위한 제국이었다. 그래도 제국은 제국. 제국이 되기 위해서는 황제가 있어야 하고, 황제에 오르기 위해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했다. 그래서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환구단에 올라 하늘에 제국의 탄생을 고했다.

   
▲ 빌딩 숲 속 환구단 정문

대한제국과 함께한 환구단의 운명

중국의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베이징의 천단을 본떠 지은 환구단은 화강암으로 만든 3층의 제단이었다. 그 옆에는 천신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를 짓고, 주변에는 어재실과 행대청, 석고각 등을 만들었다. 이렇듯 나름의 규모를 갖춘 환구단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남별궁이 있던 자리에 지어져 상징적 의미도 더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환구단의 시련도 시작되었다. 자칫 식민지 백성들의 구심점이 될지도 모르는 국가의 상징을 가만둘 리 없었던 것이다. 일제는 우선 환구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철도호텔’을 지었다. 이 과정에서 어재실과 행대청, 석고각 등도 사라졌다. 환구단의 수난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철도호텔 자리에 들어선 조선호텔이 1960년대에 재건축되면서 그나마 자리를 지키던 정문 또한 사라져버렸다. 그렇다면 지금 있는 환구단 정문은? 사라진 지 40여 년이 지난 2007년에 발견해 다시 옮겨 온 것이다. 당시 환구단 정문은 성북구 우이동의 한 시내버스 차고지 입구로 쓰이고 있었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 우리 문화재가 어떻게 대접받았는가를 알 수 있는 에피소드인 셈이다.

   
▲ 환구단 모형

담장 하나 없는 덕수궁 중화전

황궁우를 봤다면 서울광장을 지나 덕수궁으로 가보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곳이 바로 덕수궁이었다. 수문장 교대식으로 유명한 대한문을 지나면 덕수궁의 중심 건물인 중화전이 보인다. 궁궐의 정전이건만, 담장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달랑 문 하나와 함께 있는 모습이 쓸쓸해 보이기만 한다. 당연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다른 궁궐의 정전처럼 사방을 행각으로 둘렀을 터인데, 식민지 시기에 망가진 모습이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순종의 즉위식, 그 이전에 고종이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는 양위식이 치러졌다. 하지만 이 ‘양위’는 고종의 뜻에 의한 것도, 그렇다고 순종이 원한 것도 아니었다.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등을 특사로 파견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세계에 고발하려 했으나, 회의장에는 바람 앞 등불 같은 운명의 약소국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준은 죽음으로 대한제국의 뜻을 세계에 알렸고, 곤란해진 일제는 고종에게 그 책임을 물어 양위를 요구하게 된다. ‘양위 대신 대리청정(국왕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세자가 국정을 책임지는 것)’ 카드로 마지막까지 버티던 고종은 결국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양위식과 순종의 황제 즉위식이 치러진 곳이 바로 중화전이었다. 이런 비극을 마음에 품고 다시 중화전을 바라보니, 목을 두를 담장조차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는 모습이 더욱 안쓰럽게 느껴진다.

   
▲ 중명전

을사늑약이 맺어진 장소, 중명전

덕수궁 돌담길에서 이어지는 정동길을 쭉 따라 걷다 보면, 보일 듯 말 듯 작은 이정표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그냥 지나쳐버리기 십상인 작은 이정표를 따라 작은 골목길 안으로 몇 걸음만 걸어 들어가면, 시간을 거스른 듯 고풍스런 붉은 벽돌 건물이 방문자를 기다린다. 덕수궁의 왕실 도서관으로 지어졌다가 고종의 편전으로 쓰이던 중명전이 그 주인공이다. 지금은 덕수궁 밖에 있지만, 원래는 이곳도 덕수궁 안이었다.

1905년, 이곳에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은 을사늑약이 맺어졌다. 그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곳도 여기 중명전이었다. 하지만 특사는 실패하고, 일제는 이를 빌미 삼아 고종을 퇴위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한동안 잊혔던 중명전은 현재 을사늑약과 헤이크 특사에 대한 자료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관파천의 현장, 구러시아공사관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중명전에서 돌아 나와 예원학교를 끼고 올라가면 야트막한 언덕배기 끄트머리쯤에 눈에 띄게 하얀 탑 같은 것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아관파천의 현장, 구러시아공사관이다. 그 시절 이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당당한 건물들은 한국전쟁 때 모두 파괴되어 지금은 옛날 사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이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시절 조선을 놓고 일본과 패권을 다투던 ‘아라사(러시아)’의 위세를 느낄 수 있다.

황궁우에서 구러시아공사관까지, 우리 근대사의 아픈 상처를 온몸으로 간직하고 있는 대한제국 역사 산책이 드디어 끝났다. 너무 어두운 역사를 본 것 같아 마음이 찝찝하다고? 그렇지 않다. 빛나는 역사에서는 자부심을, 어두운 역사에서는 교훈을 배우면 되니까.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사진=한국관광공사 구완회(여행 작가)

여행정보

황궁우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로 112

문의 : 02-3396-5882 , korean.visitkorea.or.kr

덕수궁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문의 : 02-771-9951, korean.visitkorea.or.kr

중명전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41-11
문의 : 02-752-7525, korean.visitkorea.or.kr

구러시아공사관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21-18
문의 : 02-3396-5882, korean.visitkorea.or.kr

1.주변 음식점

리북손만두 : 만두 / 서울특별시 중구 무교로 17-13 / 02-776-7350 / korean.visitkorea.or.kr
중앙식당 : 갈치조림 /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시장길 22-12 / 02-752-2892 / korean.visitkorea.or.kr
우일집 : 곱창구이 /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5길 7 / 02-2267-9848 / korean.visitkorea.or.kr

2.숙소

토모레지던스 :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8가길 51 / 02-779-8353 / 굿스테이 / korean.visitkorea.or.kr시어소 :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2길 11 / 02-2278-7134 / 굿스테이 / korean.visitkorea.or.kr
마루게스트하우스 :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25-13 / 02-753-2555 / 굿스테이 / korean.visitkore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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