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가는 길을 알려주지 않으렵니다”

[월요신문 김지수 기자] 15세기에 쓰인 ‘화암사중창기’에는 화암사로 가는 길이 “사냥하는 사나이라 할지라도 이르기 어려운 절”이라 묘사됐다. 고려 후기의 문신이었던 백문절은 화암사에 대해 7언 40구의 길고 긴 한시를 남겼다. 그리고 현대 시인 안도현은 “잘 늙은 절 한 채”, “굳이 가는 길을 알려주지 않으렵니다”라는 글귀가 들어간 ‘화암사, 내 사랑’이라는 시 한 편을 지었다. 크고 요란한 소문은 없어도 잔잔한 기운으로 역사를 증명하는 작은 사찰, 완주 불명산에 자리한 화암사를 만나러 간다.

   
 

천천히 걸어 조용히 들어오세요

차량 진입 금지 푯말이 화암사로 향하는 첫 관문이다. 여느 사찰과 달리 화암사로 가는 길에는 별다른 입구가 없다. 산속 걸음이 그대로 속세와의 단절을 말해줄 뿐이다. 인위적 장치 없는 등산로를 걷는 것과 같이, 작은 절 하나 만나러 가는 길은 그리 녹록지 않다. 흙길을 지나 돌길을 걸어 계곡을 건너야 끝나지 않을 듯한 길이 끝나고, 철계단을 올라야 화암사 근처에 겨우 도달한다. 계단 뒤로 보잘것없지만 강한 소리를 내는 폭포수가 시원하게 떨어진다. 단아한 꽃모양 장식들이 계단 난간에 매달려 소소한 멋을 낸다. 계단을 오르고 다시 한 차례 길을 돌아야 절의 처마끝이 드디어 고개를 내민다. 이곳까지 걷는 데 20여 분이 필요하다.

화암사에서 처음 마주하는 건물은 보물 제662호로 지정된 우화루다. ‘꽃비 흩날리는 누각’이라는 뜻의 우화루는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세워진 누각이다. 절에 대규모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하는 공간으로 보통 때는 개방하지 않는다. 사찰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보이는 모습은 기둥으로 받친 2층 높이의 건물이다. 우화루 옆으로 일반 가정집에서나 놓는 문간채가 들어서 있다. 3칸으로 이루어진 문간채의 마지막 칸이 화암사 중앙으로 향하는 대문이다. 일주문 같은 별도의 입구가 없는 것도 그렇지만, 보통의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입구의 형태도 특이하다. 문간채가 누각 옆에 세워진 이유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사찰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경내 중앙이다. 대문 옆 건물 외벽에 낙서인 듯 보이는 글씨들이 어지러이 씌어 있다. 사찰 대문을 처음 세울 때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이다. 밖에서 보였던 우화루 내부 왼편에 목어가 묵직하게 걸려 있다. 우화루와 함께 보물로 지정된 적묵당이 마당 왼편에 자리한다. 적묵당은 승려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독특한 기둥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휘어진 나무에 틈을 내어 작은 나뭇조각을 끼워 곧추세웠다. 소박하지만 섬세한 당대의 지혜다. 사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중앙에 있는 노쇠한 건물이다. 바로 국보 제316호로 지정된 극락전이다.

보물 이상의 가치

국보는 국가 지정 보물들 가운데 그 가치가 좀더 특별하여 국가적 보호와 관리가 필요한 보물에 부여되는 것이다. 숲속에 감춰진 듯 자리하고 있던 화암사가 세상의 이목을 받게 된 것은 극락전이 국보로 지정되면서부터다. 1970년대 말부터 화암사에 대한 조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때 보수공사도 함께 진행했는데, 우화루와 극락전에서 건축 당시 지붕을 올릴 때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문서가 발견되었다. 자료를 종합한 결과, 극락전이 지어진 때는 고려 후기인 1297년에서 1307년 사이, 그후 중창된 것은 1425년에서 1440년으로 추정되었다. 또 정유재란 때 극락전이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05년에 재건되고, 1714년에 다시 보수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여러 자료로 미루어, 소실 이전의 모습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현재의 극락전은 조선시대에 지어졌지만 그 이전 백제시대 건축술을 따른다고 한다. 가장 큰 예로, 극락전에 적용된 하앙식 건축술을 들 수 있다. 하앙이란 지붕과 기둥 사이에 끼운 기다란 나무판을 말하는데, 이것은 백제시대 건축술로 알려져 있다. 백제의 장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건축한 것으로 전해지는 몇몇 건물과 탑에서 이 하앙식 구조가 발견되었다. 화암사 극락전에서 발견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그 흔적이나 문화재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 하앙식 구조가 백제를 통하지 않고 중국에서 바로 일본으로 건너온 건축술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극락전에 사용된 하앙식 구조가 국내외에 알려지면서 건축사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앙식 구조가 백제에서도 사용되었다는 게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이외에 다른 사례는 발견되지 않아 화암사 극락전이 우리나라의 유일무이한 증거인 셈이다.

화암사 극락전의 하앙식 구조는 특이하게 건물 앞뒤의 모양새가 다르다. 앞부분은 용머리를 조각하여 구조재에 장식을 더한 형태이고, 뒤쪽 하앙은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뾰족하게 다듬었다. 법당 내부 천장인 닫집에는 용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꿈틀거리는 형상을 조각했다. 세월이 흘러 색이 바랬지만, 용의 비늘 하나에도 섬세한 색칠이 엿보인다.

극락전 안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인 동종이 있다. 크기가 작은 이 종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조선 광해군 때에 다시 만들어졌다. 밤이 되면 종이 스스로 울려 스님을 깨우고 자신을 지켰다는 전설이 있다.

   
 

천년을 넘어 만년을 향해

2014년 11월, 화암사에 있는 탱화 한 점이 문화재로 새롭게 등록되었다. 법당 밖에서 행사를 할 때 걸어놓는 대형 불화인 괘불도이다. 이 괘불도는 불교 용어로 법신(法身, 진리 그 자체)을 뜻하는 비로자나불이 그려진 보기 드문 탱화이다. 채색에 서양화법이 접목된 근대적 불화 기법을 보여준다. 괘불도는 현재 법당 안에 모셔두고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찰 입구 우화루에 특수 촬영한 사진이 걸려 있다. 촬영을 위해 괘불도를 꺼내 펼쳐든 것이 20여 년 만의 일이었다.

화암사는 김제 금산사의 말사이다. 건물 자체가 국보이고 보물이면서 여러 문화재가 있는 만큼 더욱 꼼꼼하고 세심하게 관리된다. 사찰 개방시간도 정해져 있다. 동절기에는 오후 5시, 하절기에는 오후 5시 30분이면 대문이 잠긴다. 산속은 더욱 빨리 어두워지기 때문에 사찰을 돌아보는 시간을 잘 맞추는 것이 안전하다.

글·사진 : 한국관광공사 김애진(여행작가)

여행정보

화암사
주소 : 전북 완주군 경천면 화암사길 271
문의 : 063-261-7576, korean.visitkorea.or.kr

1.주변 음식점
정승댁 : 완주군 경천면 대둔산로 492 / 063-262-7738
청산가든 : 완주군 경천면 경천리 35 / 063-261-9696
오복식당 : 완주군 경천면 경천리 609 / 063-261-8197

2.숙소
황토내음 : 완주군 경천면 경천리 160-1 / 063-262-0352
코아모텔 : 완주군 고산면 대아저수로 410-54 / 063-263-2388
광성펜션 : 완주군 고산면 가새기길 30 / 063-263-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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