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찬탈 목적의 쿠테타인가? 조국을 위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나?

[월요신문 김영 기자] 5.16 군사정변은 우리나라 정치 현대사를 논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해방 후 10여년 간 이어진 이승만 독재정권이 4.19 혁명으로 무너지고 난 뒤 잠시나마 민주정부가 들어서는 듯 했으나, 쿠데타로 인한 군부독재가 신군부로까지 이어지며 30여년 간 이 땅에 지속됐기 때문이다. 5.16 군사정변은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아직까지도 국민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민주정권을 무너트린 권력형 쿠데타란 비판이 상당한 가운데 일각에서는 이를 조국 근대화를 위한 어쩔수 없는 선택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군사정변 성공 후 육사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시위를 지켜보는 박정희 소장과 그 측근들.

군부의 정권 탈취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물러나자 정권은 민주당 출신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가 잡게됐다. 제2공화국이 출범한 것인데 해방 이후 이어져 온 우리사회 혼란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경제분야에 있어 이렇다 할 대안이 나오지 않았으며 신‧구파로 나눠진 집권당 내부 갈등은 국민들 사이에서 지탄대상에 올랐다.

그런가하면 군부에서는 나름대로의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해방 직후 군의 주요 자리를 광복군‧중국군‧일본군‧만주군 출신 장교 등이 차례로 나눠갔다 보니 그에 따른 인사적체가 심각했고 중견장교들의 불만 또한 커져갔던 것이다.

내각을 이끌고 있던 장면 정부가 국군 감축 및 그로인해 발생하는 재원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룩하겠다고 밝히자 군 내부에서는 정부의 실직자 만들기 정책이란 반발까지 쏟아졌다.

그런가하면 일각에서는 미국 유학생을 기준으로 당시 군 내부 엘리트 인재들의 업무능력이 일반 공무원이나 정치인보다 나은 수준이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현실 정치의 막막함과 군인 신분의 유지에 대한 위기감 그리고 정치인들보다 본인들이 더 우월하다는 자신감 등이 두루 섞이며 1961년 5월 16일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이와 관련 당시 쿠데타의 명목상 지도자는 육군참모총장을 맡고 있던 장도영 육군 중장이었으나 실질적인 리더는 제2군부사령관을 맡고 있던 박정희 소장 및 그를 따르던 육군사관학교 8기 중심의 영관급 장교들이었다.

전역을 준비하던 박정희

만주군 출신으로 알려진 박정희는 여순 반란사건 당시 남로당 활동 전력이 문제시 되며 사형이 선고되기도 했으나 백선엽 등 동료군인들의 도움으로 형을 면했다. 대신 그는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갔는데 이내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군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군 내부에서 승승장구 6군단 부군단장, 군수기지사령관,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의 요직을 거치기도 했으나, 쿠테타가 있던 1961년에는 육참부장에서 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좌천되며 사실상 곧 군을 떠날 예비역 대접을 받아야 했다.

군내 입지가 확실하지 않게 여겨지던 그가 군부 쿠테타를 주도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정치인으로 기질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그는 좌천형 인사가 내려지기 이전부터 쿠데타를 준비해 왔다.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수차례에 걸쳐 정변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4.19 1주기를 맞아 거사에 나선 것 역시 이때쯤이면 제2공화국 실정에 대한 국민적 반발이 상당할 것이란 나름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전광석화 같던 쿠데타

쿠테타 계획 당시 박정희는 육사 8기생, 해병대, 육군 공수특전단, 6군단 포병대 등을 동원해 청와대, 방송국, 육본을 위시로 한 서울의 주요 기관을 차례로 점령할 계획이었으나 거사 당일 각 부대 병력차출에 어려움이 발생하며 쿠데타 실패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다.

그러다 김윤근 준장의 해병대 병력 1500명이 쿠데타 세력에 합세하자 즉각 한강을 넘어 서울 시내 주요 거점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다소 물리적 저항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이들마저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드리며 별다른 어려움 없이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거사 다음날 아침에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쿠테타 성공 소식을 전국에 알렸으며, 18일 오후 1시에는 장면 총리가 사퇴 성명을 내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박정희의 쿠데타 성공과 관련해서는 장도영 중장의 애매모호한 태도가 한 몫한 것으로도 전해진다. 육참총장으로서 사전에 군사정변 첩보를 접수했고 대규모 병력동원도 가능했던 그가 사실상 이를 묵인해줘서 쿠데타가 성공했다는 주장이다.

   
군사정변 이후 특전사 대원들에게 둘러쌓여 조리돌림 당한 1공화국 시절 정치깡패 이정재와 그 부하들.

5.16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시절에는 5.16 군사정변을 ‘혁명’이라 부르며 이를 국가적 차원에서 기념했었다. 여의도공원을 5.16공원이라 부르기도 했을 정도인데 이는 군부정권인 이들의 정통성 측면에서 볼때 5.16 쿠테타를 ‘구국의 위한 결단’으로 봐야했기 때문이다.

5.16에 대한 표현이 혁명에서 군사정변으로 바뀐 것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5년에 이르러서였다. 이때부터 우리사회에서는 4.19 의거를 4.19 혁명으로 5.16 군사혁명은 5.16 군사정변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에도 5.16에 대해 혁명이라 보는 시각들이 존재한다. 군사정권 수립 후 우리네 경제가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의 공이 박정희 정부에게만 있느게 아니다는 반론이 존재한다. 특히 이같은 주장을 하는 측에서는 박정희 정부가 무너트린 제2공화국에서 군사정변 이전에 이미 경제발전을 위한 정책들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며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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