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위한 군대, 호국의 상징

[월요신문 김영 기자] 지난 2008년 8월 경북 의령 군수 포함 지역주민 1만 5583명은 ‘호국의병의 날’ 기념일 제정을 국회에 청원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 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르고 그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자는 취지였다. 그로부터 1년 6개월 뒤인 2010년 2월 국회에서는 ‘의병의 날’ 기념일 제정 안건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행정안전부는 그해 5월 매해 6월 1일을 ‘의병의 날’로 삼아 기념하기로 제정‧공포했으며 2011년 6월 1일 제1회 의병의 날 행사를 의령에서 개최했다.

   
구한말 일제에 맞써 싸운 의병.

의병과 민병은 달라

의병은 ‘자발적으로 생겨난 군사조직’으로 관군과 배치되는 개념으로 일해할 수 있다. 이 경우 의병은 세계 여러 나라 역사에서 등장한 민병(民兵)과도 사뭇 닮아있으나 서로 간에는 다소 큰 차이가 존재한다.

일단 근대 이전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민(民)이란 개념 자체는 피지배층만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배층인 양반들이 주로 조직해 운영됐던 의병을 민병이라 부르는데 다소 무리가 따르는 이유다.

또한 의병은 그 명칭에서 알수 있듯 ‘정의(義)를 행하는 군사조직’을 뜻하는데, 이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결성된 민병보다 상위개념이라 할수 있겠다.

이같은 의병은 우리 역사 속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의 구국 활동이나 고려시대 대몽항쟁을 이끈 삼별초 등이 그 예이다.

다만 조선시대 이전까지 존재했던 이들 군사조직을 의병이라 부르진 않고 있는데 이는 이들 조직이 사병(私兵)의 성격이 강하고 군사활동 중 관군으로 편입된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임란(壬亂) 때 일어선 의병

우리 역사에서 본격적인 의병활동의 시작을 알린 시기는 조선 중기 발생한 임진왜란 때였다. 조총이란 신식무기로 무장한 왜군에 조선군이 속절 없이 밀리며 한양은 물론 평양성까지 넘어가자 조국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다수의 의병조직이 결성되고 이들 주도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임란 당시 의병은 농민들이 주로 참가했으며 전직 관료 및 사림(士林) 그리고 승려들이 조직하고 지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이들은 지역 지리에 익숙하고 거기에 맞는 전술 및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앞세워 왜군과 맞썼다. 무기의 질이나 병사 수에서 불리했음에도 매복과 기습 및 위장전술 등 유격전술 위주로 대항하며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중 큰 전과를 세우고 명성을 떨친 이들로는 평안도의 조호익·서산대사, 함경도의 정문부, 경기도의 심대·홍계남, 경상도의 곽재우‧정인홍, 충청도의 조헌, 전라도의 김천일‧고경명, 황해도의 이정암, 강원도의 사명당 등이 있다.

한가지 주목해 볼 부분은 같은 의병이라고 해도 발생 지역에 따라 그 성격 및 목적에 다소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임란 당시 왜군의 직접적인 피해를 본 경상도와 경기도 일대 의병이 향토지역 수호를 의병활동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반면 수군이 건재해 왜군의 피해를 덜 받았던 전라도에서는 왕을 위해 출병한 근왕의병이 많았던 것이다.

반면 정유재란 당시에는 전라도가 왜군의 주요 공격목표가 되며 경상도 출신 의병들이 전라도로 향군하기도 했다.

조선인의 기개 보여준 구한말 의병

임란 의병과 함께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치열하게 외적과 맞서 싸운 의병으로 기억되는 구한말 의병의 경우 1895년 을미의병과 1905년 을사‧정미의병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을미의병의 경우 일제의 단발령 및 명성황후 시해에 분개해 지방의 유생 중심으로 일어난 의병들로 위정척사를 기치로 내건 경우가 많았다. 다만 이들은 군사적으로 거둔 성과가 많지 않았고 아관파천 뒤 일제 영향력이 줄어들자 대부분 자진 해산했다.

반면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을사의병의 경우 꽤 오랜기간 유지된 것은 물론 군사적으로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특히 1907년 군대가 해산된 뒤 상당수 군인출신 인사들이 합류되며 조직의 힘을 키우기도 했으며 이때 의병을 정미의병이라 부르기도 한다.

당시 유명한 의병장으로는 몰락양반 출신의 안계홍과 평민 출신 신돌석 등이 있는데 이들의 경우 위정척사를 강조한 을미의병과 달리 공평한 토지 분배 등 반봉건 기치를 주장하기도 했다.

구한말 의병은 그 수가 많다 보니 다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일본측 통계자료에 따르면 의병활동이 특히 활발했던 1907년과 1910년 사이 의병에 참여한 이들은 15만여명에 달하며 2851회 충돌에 1만 6700명 사망, 3만 6770명이 부상을 입었다.

당시 의병 투쟁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은 동학의 발생지였기도 한 전라도 지역으로 곡창지대였던 이 지역의 일본인 지주가 의병 활동의 주요 목표가 됐다. 이에 일제에서는 1909년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여 국내 의병 조직에 괴멸적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1910년 이후 국내에서는 의병 활동이 거의 사라졌고 의병 출신 인사 상당수는 만주 등으로 건너가 현지에서 일제에 대한 무력 시위를 이어갔다. 또 이들 중 상당수는 이후 독립군과 광복군 등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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