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냉전과 독재자 야심이 불러온 슬픈 역사

[월요신문 김영 기자] 수백만의 민간인이 전쟁 통에 목숨을 잃고 그보다 몇 배 많은 부상자와 이를 뛰어넘는 수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던 6.25전쟁이 올해로 65주년을 맞이했다. 한국전쟁은 광복의 기쁨도 잊게 만든 우리 민족 최대의 슬픈 역사로 기억된다. 후삼국 시대 이후 천년동안 없었던 민족동란이 일제강점기가 끝남과 동시에 이 땅에 펼쳐진 것으로 그로인한 상흔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45년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회의 모습.

1950년 6월 이전

1945년 8월 일본제국이 태평양전쟁에 패하며 36년간 이어진 일제강점기는 끝이 나고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이 선언하기 한참 전부터 한반도 정세는 단일민족 단일국가를 원하던 한민족들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소련의 부상과 이를 견제하던 미국의 대결구도가 동서 진영에서 펼쳐졌고 그로인해 전범국가도 아니었던 한국이 비극적 대결의 장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해방 직후 38선을 기점으로 북한지역을 소련군이 남한지역을 미군정이 점령했던 것으로 이후 5년 동안 남북 군사경계선 인근에서는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빈번히 발생했다.

한민족 입장에서 더욱 안타까운 점은 미국과 소련의 우산 아래 양진영의 수장으로 올라선 인물들이 대화나 타협보다 무력에 기반을 둔 통일국가 성립을 원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30대 젊은 나이에 소련을 등에 업고 내각총리 자리에 오른 북한 김일성은 본인 스스로 한반도의 스탈린이자 모택동이 되고자 했다.

무력을 통한 적화통일을 달성하고 이 땅을 사회주의 통일국가로 만들려 했던 것으로 그의 무력침탈 야욕은 미소간 직접 대결에 상당히 조심스럽던 소련과 중국으로서도 어찌하지 못했다. 미소 냉전 구도 속 김일성의 욕심이 6.25 전쟁을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이 됐던 것이다.

   
6.25 전쟁 직전 북한 김일성.

1950년 6월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러시아 외교문서에 따르면 6.25 전쟁이 있기 전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을 잇따라 방문 남침 계획에 대해 알리고 지원 및 지지를 요청했다.

김일성의 이 같은 요구에 대해 당시 소련은 중국 측의 결정에 따라 지원 의사가 있다고 밝혔으며 중국은 고심 끝에 이를 허락했다.

소련과 중국 지원을 약속 받은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6시 기습적인 남한 침공을 실시했다.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38선을 넘어온 것으로 무방비 상태였던 남한은 북한군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북한의 무력침공 소식이 전해진 뒤 국제연합(UN)에서는 즉각 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하고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국 맥아더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UN군 참전을 승인한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난 남한군의 반격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며 이뤄진다. 낙동강을 지켜낸 한미연합군의 북진이 시작된 것으로 전쟁 초 남한군이 속절없이 밀렸던 것처럼 북한군 역시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전세가 단 몇 달 사이 오락가락 하는 동안 한반도 곳곳에서 수많은 양민 피해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남한을 점령한 북한군이 우익 소통을 이유로 무차별적인 학살을 가했고 이들을 몰아낸 한미 연합군 또한 좌익 토벌이란 이름 아래 이념과 아무 상관없던 민간인에게마저 총부리를 겨눴던 것이다.

6.25 전쟁은 1950년 겨울 중공군이 참전하며 더욱 참혹해 진다. 한미 연합군이 북한군을 압록강까지 밀어내자 미군의 만주 침공을 두려워 한 중국에서 전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며 피해가 더욱 커진 것. 당시 중공군은 이른바 인해전술을 앞세워 진격하기 시작했는데 그 기세에 눌린 한미 연합군은 후퇴를 선택해야만 했다.

이후 2년 가까운 시간동안 남북한 양측은 현재 휴전선 인근에서 대치하며 밀고 밀리는 땅따먹기 싸움을 시작했다. 양측 모두 전쟁 초반 피해가 막심했던 탓에 더 이상의 대대적인 물량공습을 하지 못한 채 국지전 양상의 전투를 이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는 전쟁의 조기 종식을 바라던 미소 양국의 의지가 반영된 휴전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북한군과 UN군 간 정전협정은 전쟁 발발 3년이 넘은 1953년 7월 27일 맺어진다.

한편 중국측 자료에 따르면 북한 김일성은 정전 협정을 맺은 지 13년 뒤인 1965년 제2차 한국전쟁을 도모했으나 중국 측 반대로 그 계획을 접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38선을 통과하며 기념사진을 찍는 한국군 3사단 장병과 미국 군사고문단.

1953년 7월 이후

한국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다. 이때 사용된 폭탄의 수는 불분명하지만 1차 세계대전에 맞먹는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은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를 만들었으며 1000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이 기간 파괴되어 한반도 전체에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이와 관련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남한군 60만 명이 전쟁 중 사망했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북한 인구의 11.1%에 해당되는 113만 명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했고 남북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했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됐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대한민국과 북한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면서, 2015년 현재까지도 휴전선에 의한 분단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전쟁 뒤 폐허가 된 서울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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