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성장의 결실에서 안전불감증 대표사례로 낙인

[월요신문 안재근 기자] 1995년 6월 29일 오후 6시경 믿을 수 없는 뉴스 속보가 전국민을 충격에 빠트렸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던 대형백화점의 붕괴 소식이었다. 초호화 백화점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치던 ‘삼풍백화점’이 별다른 외부영향 없이 한순가 무너진 것으로 부실시공에 따른 이 사건은 한 해전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사고와 함께 고속성장에 사로잡혀 안전을 경시했던 대한민국 사회 전체에 ‘지금 이대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던져줬다.

   
건물 가운데 부분이 완전히 내려 앉은 삼풍백화점. <사진제공= 뉴시스>

삼풍백화점은 1989년 12월 삼풍건설산업이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세웠던 백화점으로 당시 매출액 기준 대한민국 1위를 달리던 초호화 백화점이었다. 규모 역시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다음이었다.

그러나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은 한 순간 무너져 내렸다. 사고로 인해 502명이 사망하고 937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 6명의 실종자는 끝내 찾을 수 없다. 한국 역사상 6.25 한국전쟁에 이어 가장 큰 인명피해 사고로 피해액 역시 2700여억원에 달했다.

안전 무시한 불법 부실 공사

삼풍백화점 붕괴와 관련해서는 여러 원인들이 존재한다.

우선 원칙이 무시된 건설과정부터 문제였다.

1987년 설계 당시 삼풍백화점은 ‘삼풍랜드’라는 명칭의 대단지 종합상가로 설계됐다. 규모는 지하 4층에 지상 4층이었다.

그러나 공사가 거의 마무리 될 쯤 시행사인 삼풍건설산업측에서는 건물 용도를 백화점으로 변경했다. 이 과정에서 시공사가 우성건설에서 삼풍건설산업으로 변경되기도 했다.

삼풍에서는 용도 변경에 따른 구조 변경 관련 전문가의 검토도 받지 않았고 준공검사도 무시한 채 가사용 승인만 받고 백화점을 개점했다. 준공 후 9개월이 지나 준공승인을 받았으나 이 역시 로비에 의한 것이었다. 1994년 1월에는 지하1층에 대한 구조변경을 실시했고 그해 11월에는 위법 건축물 판정까지 받았다.

시공차제도 부실로 점철돼 있었다.

당초 삼풍백화점은 무량판 공법(플랫 슬래브 구조) 건물로 설계돼 초기 건축물 구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용도 변경 후 이 모든 게 뒤집어 졌다는 점이다.

일단 삼풍은 넓은 매장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상가건물의 벽을 없엤다. 벽과 기둥이 같이 있었을 때는 이 둘이 바닥을 같이 버텨 줬지만, 벽이 사라지는 바람에 기둥에만 무게가 분산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를 만들기 위해 각층에 구멍을 뚫었는데, 이 때 사라진 구멍만큼 콘크리트가 사라지면서, 옆에 있는 기둥이 버텨야 하는 무게는 더 커졌다. 건물을 지탱할 기둥 자체도 구조 변경 후 당초 계획보다 줄어들었다.

철근 역시 문제투성이였다. 삼풍백화점의 경우 바닥과 기둥을 연결하고 기둥이 옥상을 뚫고 나오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L자형 철근을 사용해야 했는데, 시공사에서는 비용부담을 이유로 ㅡ자형 철근을 사용했다. 그 결과 바닥과 기둥을 연결할 수 없게 됐고 기둥이 바닥을 뚫고 나오는 일이 일어났다. 건물이 붕괴될 때 아무런 제동장치 없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또한 본래 4층까지만 설계를 했던 삼풍백화점은 우성과의 계약 파기 이후 무리하게 5층으로 확장공사를 시행하며 바닥과 기둥이 추가로 생겼고 이에 따라 기둥이 버텨야 할 무게는 더 커졌다.

그것도 모자라 5층의 용도까지 바꿨다. 처음에 5층은 롤러스케이트장으로 계획됐지만 백화점 용도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식당가로 불법 변경됐다. 그 결과 5층 바닥에는 배수로가 설치되고 콘크리트도 추가되면서 건물에 더 많은 무리가 발생했다.

옥상에 있던 냉각탑을 무리하게 옮긴 것도 붕괴에 영향을 줬다. 지하공간 부족 문제로 옥상에 설치했던 냉각탑 자체가 건물 전체에 부담이 된 것을 물론 민원을 이유로 이를 손으로 옮기다 보니 건물 전체에 균열이 발생했다.

   
사고 뒤 20여일간 진행된 구조활동. <사진제공= 뉴시스>

사고보다 더 어이없던 안전대책

삼풍백화점 붕괴는 사실상 예견된 재앙이란 지적이 상당하다. 붕괴가 있기 전부터 건물 전반에서 위험신호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993년에는 서점 설치 관련 건물 1층에 막중한 하중부담이 발생 건물 전체에 균열과 뼈대 구부러짐 현상이 일어났다.

1995년 4월에는 5층 북관 식당가 천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5월부터는 이 균열에서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5층 바닥은 서서히 내려앉았다.

더욱 황당한 것은 이한상 삼풍백화점 대표이사 등 경영진이 대책마련에 나선 것이 사고 당일인 6월 29일이었다는 점이다.

사고 당일 오전 9시 건물 5층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을 확인한 경영진에서는 당초 5층만을 출입통제한 뒤 영업을 계속했다.

오후 3시 경에는 건축전문가들이 현장을 방문 긴급보수 의견을 제시했고 경영진에서는 보수공사를 실시한다는 계획아래 1층에서 영업은 계속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사고 직전이던 5시 40분에는 임원실로 건물 붕괴 위험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왔고 삼풍 임원진 전원은 건물 밖으로 도주했다. 이 과정에서 건물 1층에 있던 1000여명의 고객과 종업원들에게는 아무런 대피명령이 없었고 10여분 뒤 건물은 완전히 내려앉았다.

사고 이후

1996년 8월 23일 대법원에서는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관련 삼풍그룹 회장 이준에게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적용 징역 7년 6개월 확정 선고했다. 삼풍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설계변경 등을 승인해 준 서울시 전 서초구청장 이충우, 황철민에게는 뇌물수수죄가 적용돼 각각 징역 10개월에 추징금 3백만 원과 징역 10개월에 추징금 2백만 원이 확정됐다. 여타 사고 관련자들에 대한 형벌 역시 내려졌으나 대체로 그 수위가 미약한 편이었다.

그런가 하면 사고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며 이같은 문화를 개선하기 위한 사회적 움직임도 활발히 이뤄졌다.

그럼에도 현재 대한민국은 여전히 안전에 둔감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와 판교 붕괴 사고 그리고 최근의 메르스 사태까지 일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이를 경시하는 풍토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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