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클 신화' 이끈 실리콘밸리의 사무라이

[월요신문 김미화 기자] 최근 한국경제의 저상장 기조가 장기화되면서 '기업가 정신'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기업가정신은 도전, 혁신, 미래를 보는 안목, 사회적 책임 등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투자가 확대되고 생산과 고용이 늘 수 있기 때문. 즉, 기업가정신이 회복되면 경기도 회복되고 기업가정신이 쇠퇴하면 경기도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되는 셈이다.

<월요신문>은 기업가정신과 한 나라의 경제수준이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고 '열정을 꿈으로 만든 글로벌 CEO 이야기를 연재한다. 다섯 번째 순서로 미국의 사업가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의 기업가 정신을 살펴봤다.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

지난 3월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543억 달러의 재산으로 세계 5위, 미국 3위에 이름을 올린 래리 엘리슨(71).

엘리슨은 전 세계 시장 40%를 점유하고 있는 세계 최대 데이터베이스 개발 업체이자 마이크로소프트와 쌍벽을 이루는 소프트웨어 기업 '오라클'의 창립자이자 실리콘 밸리의 초기 개척자다.

그는 1977년 오라클 창업 때부터 2014년 9월까지 37년간 CEO로서 경영을 진두지휘했으며, 현재 회장 이사회 의장 겸 최고기술담당으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개척자 중 마지막 현역

엘리슨은 1970년대에 명문 대학을 중퇴하고 실리콘밸리로 와서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섰다. 그가 대학을 그만둔 것은 실리콘밸리로 가서 창업을 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엘리슨의 복잡한 가정사와 성장 과정이 관련돼 있다.

러시아 유대인 출신인 엘리슨은 1944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당시 19세의 미혼모로, 엘리슨이 생후 9개월 때 폐렴에 걸리자 양육을 포기했다. 이후 엘리슨은 시카고에 사는 중산층 유대 집안으로 입양됐다.

엘리슨에 따르면 양어머니는 따뜻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양아버지에 대해서는 배려 없고 엄격한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엘리슨은 어릴 때부터 양아버지에 대한 적대심을 키워 나갔으며, 이는 엘리슨의 성장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슨은 보금자리였던 양어머니가 죽자 다니던 명문대를 그만두고 무작정 캘리포니아로 가서 반문화를 체험했다. 당시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샌프란시스코만 주변 지역은 히피들의 천국으로 현실에서 도피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10년 동안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다. 웰스 파고 은행(Wells Fargo Bank)에서 기술자 감독관, 소방수 연금보험(Fireman’s Fund Insurance)에서 IBM Mainframe 관리 등 컴퓨터 관련 일자리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는 20대 시절, 직업은 변변치 않아 버는 돈이 없었지만 쓰는 데는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 은행 대출의 도움을 받아 첫 요트를 구매했고 성형 수술을 했고 1000달러 넘는 자전거를 구매했다.

이와 관련 엘리슨의 주변인들은 엘리슨이 어린 시절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돈’을 추구했던 버릇이 오히려 그가 사업을 꾸려나가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엘리슨이 자존감을 위해 돈을 버는 것에 집중했고, 무엇보다 번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악동히피에서 IT 경영자로

1970년대 중반 한 데이터베이스 회사에서 일하던 엘리슨은 그곳에서 창업 동지인 에드 오우츠와 로버트 마이너를 만났으며, 이들과 단돈 1200달러로 '시스템개발연구소(SDL)'를 창업하게 된다.

이후 엘리슨은 회사 이름을 '오라클'로 바꾸고, 회사 내 직급을 파괴하고 마케팅을 중시하는 경영 전략을 펼치게 된다. 당시 '품질이 좋은 제품이 잘 팔리는 게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제품이 잘 팔린다'는 그의 지론은 신생 기업이던 오라클을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줬다.

더불어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카리스마,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고한 믿음, 주저하지 않는 결단,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는 '도전 정신' 또한 엘리슨에게 성공을 가져다 준 요인이다.

오라클의 경쟁력은 포스트-PC 시대에 대비한 엘리슨의 집요한 제품 개발에서 나왔다. 엘리슨은 일찌감치 인터넷 서버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는 포스트-PC 시대에 핵심기술로 부상할 데이터베이스 분야에 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특히 엘리슨은 데이터베이스 시장의 미래를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던 시절에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제품의 상용화에 최초로 도전해 성공했고, 데이터베이스 업계에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나서는 네트워크 컴퓨터에 새롭게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한편 이같은 엘리슨 특유의 도전적인 경영 방식은 오라클을 세계 최대 데이터 베이스 업체로 키워냈지만 한때 오라클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다.

지난 1990년 오라클이 매출액을 과대하게 부풀렸다는 이유로 매출액을 조정하다가 주가가 폭락하고 자금 압박을 겪는 수난을 겪었던 것. 게다가 1991년 그는 여자친구와 하와이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생전 처음 파도타기에 도전했다가 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재기했고, 회사 크리스마스 파티까지 취소하는 등 약 2년 간 가혹하게 구조 조정을 해서 오라클은 해마다 40∼50% 고성장을 이루는 기업으로 되살아났다.

야망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엘리슨은 실리콘 밸리 내에서 '사무라이'라고 불린다. 비즈니스 마인드가 다소 떨어지는 IT전문가들만 판치던 시절 강력한 사업가 마인드로 경쟁자들을 차례차례 베어버렸다는 의미다.

오라클은 2014년 382억7000만 달러의 매출에 109억5000만 달러의 세후 이익의 실적을 올린 세계적인 우량 기업이다. 직원 숫자도 12만2400명에 달한다. 시가총액이 468억 7000만 달러에 이르며 총 자산은 903억4000만 달러로 평가된다.

지금까지 미국 CEO 중 가장 많은 연봉을 받은 사람으로 기록된 엘리슨은 늘 자신만만하다. 그는 "인생은 상어와 같다. 늘 앞으로 전진하고 매일 더 잘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죽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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