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규 월요신문 편집인.

김훈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라면이나 짜장면은 장복을 하게 되면 인이 박힌다. 그 안쓰러운 것들을 한동안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공연히 먹고 싶어진다. 인은 혓바닥이 아니라 정서 위에 찍힌 문양과도 같다. 세상은 짜장면처럼 어둡고 퀴퀴하거나, 라면처럼 부박(浮薄)하리라는 체념의 편안함이 마음의 깊은 곳을 쓰다듬는다. 이래저래 인은 골수염처럼 뼛속에 사무친다”

이 글을 읽다보면 서민의 고단한 삶에 천착하고, 그 삶을 자신의 것으로 육화한 작가의 깊은 내면이 느껴진다. 그러다 문득 이런 글을 작가가 아닌 정치인이 썼다면? 가정이긴 하지만 그런 정치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은 그러나 전혀 딴판이다. 우리 정치인들은 매일 매일 고단하지도 않거니와 라면과 짜장면을 장복하는 일도 없다. 부박하지도 않으며 외려 살벌하기 짝이 없다. 친박-비박, 친노-비노로 갈려 이전투구에 여념이 없는 현실이 그 반증이다.

우리 정치권의 이런 현상은 얼핏 조선시대 사색당파를 연상시킨다. 조선시대 당파 싸움은 선조 때부터 붕당의 싹을 보였다. 선조 8년인 1575년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동인’과 ‘서인’으로 갈렸고, 선조 24년 들어서는 세자 책봉문제로 물러난 서인 영수 정철의 처벌 문제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선조 32년에는 홍여순이 대사헌으로 천거되었을 때 남이공이 반대한 일을 계기로 ‘대북’과 ‘소북’으로 갈렸다. 1683년 숙종 9년 때는 숙종의 외척(광산김씨 김익훈)에 대한 처분을 놓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1762년 영조 38년 때는 사도세자 문제로 노론이 ‘시파’와 ‘벽파’로 갈렸다.

500여년 전 붕당정치를 낳은 선조들의 DNA가 유독 우리 정치인들에게만 유전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판박이처럼 닮았단 말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영조 이후로 넘어오면서 당파와는 거리가 먼 정치인이 등장한다. 목민심서의 저자 정약용 선생이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가 그렇듯 <목민심서>의 행간에는 민초의 고단한 삶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깃들어 있다.

정약용 정치철학의 핵심은 민본 사상이다. 신분 제약이 엄격했던 그 시대에 선생은 양반과 상민이 유기적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사람은 각자 맡은 역할이 있을 뿐, 귀천은 없다는 게 선생이 주창한 실학사상의 정수다.

다시 현실정치로 돌아와 보자. 정치부 기자들의 단골 용어인 친박-비박. 친노-비노, 여기에 ‘정치적 가치’라곤 찾아볼 수 없다. 음습한 권력 싸움만 있을 뿐이다.

권력은 힘을 나눈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권력의 권(權)은 저울의 균형을 잡는 추로, 힘은 나눴을 때 균형이 유지된다. 그런데 권력을 움켜쥐려고만 하니 패거리 정치밖에 더하겠는가. 정치가 타협의 예술이라는 말은 이 정권 들어와서는 사어(死語)가 된지 오래다.

이제 우리 정치인들도 스스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서민의 고단한 삶을 맛보시라. 윈스턴 처칠이 남긴 “전쟁에선 오직 한번만 죽지만 정치에선 여러번 죽는다” 말도 한번쯤 기억하시라. 윈스턴 처칠은 이런 명언도 남겼다.

“모든 나라는 그 나라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게 되어 있다”

저작권자 © 월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