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사진출처-이준구 교수 홈페이지>

어제 국사 교과서 확정 고시가 발표됨에 따라 이제 국정화 문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입니다.

저들의 손에 칼자루가 쥐어진 셈이니 아무것도 꺼릴 것 없이 마음대로 휘둘러 댈 게 너무나도 뻔하니까요.

기대를 걸 만한 점이 눈꼽만큼도 없는 정권이지만 그래도 실낱 같은 희망을 갖고 살아 왔는데 막상 확정 고시 발표가 나니 허탈한 심정 이루 말할 수 없군요.

국민의 절반 이상이 반대하는 데다가, 그 문제의 전문가들인 역사학자들이 압도적으로 반대하는 상황에서 국민을 무서워하는 대통령이라면 어찌 감히 홀로 옳다고 주장할까 싶었지요.

국사 교과서 국정화는 현대판 ‘분서갱유’(焚書坑儒)에 해당하는 끔찍한 일입니다.

전문가들이 공들여 써놓은 검인정 국사 교과서들을 죄편향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이유를 대서 모두 폐기해 버릴 텐데, 그것이 진시황이 책을 태워버린 ‘분서’와 무엇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

또한 이 땅의 명망 있는 모든 역사학자들이 국사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숨어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선비들을 구덩이에 파묻은 진시황의 ‘갱유’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저들은 역사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축배를 들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역사의 죄인’이 되어 두고두고 손가락질을 받을 자충수를 둔 것입니다.

정권은 짧고 역사는 깁니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이런 어리석은 짓을 단죄하지 않고 그대로 묻어줄 것 같습니까?

저들은 국정화된 교과서가 어떤 내용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면서 반대를 하느냐고 우리를 몰아붙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의 핵심을 결코 아닙니다.

문제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국가가 역사 서술에 관여하는 것이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는 데 있습니다.

국가가 역사를 통제하고 결국 국민의 정신까지 통제하려드는 반민주적인 일이 일어날까봐 걱정을 금치 못하는 것입니다.

지난 MB정권도 국민의 절반 이상이 반대하고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결사반대하는 4대강사업을 철권으로 밀어붙였습니다.

박근혜정권 역시 4대강사업 이상으로 반대여론이 강력한 국정화 문제를 철권으로 밀어붙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습니다.

이 두 대통령이 모두 자신을 철벽처럼 지지하는 절반의 국민에 기대어 나머지 절반의 국민을 헌신짝처럼 내버렸습니다.

대통령을 뽑을 때야 절반의 지지를 얻어 당선될 수 있지만, 일단 당선이 되면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어야 마땅한 일 아닙니까?

자기 지지층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와 다른 소리에는 귀를 막는다면 대통령의 자격이 눈꼽만큼도 없는 셈이지요.

적어도 반대의견에 귀기울이고 설득하려는 최소한의 예의만은 보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박근혜정권은 그런 최소한의 예의마저 저버린 채 근거없는 일방적 홍보전술로 맞섰습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가장 심각한 국론분열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국론분열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는 적반하장의 추태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이 반쪽짜리 대통령을 연이어 두 번이나 뽑은 죄로 우리의 강산, 우리의 정신은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 상처는 두고두고 우리를 괴롭힐 것이 분명합니다.

어제 국정화 확정 고시가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지연 선생의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이란 말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의 죽음을 슬퍼하며 목 놓아 울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출처-이준구 교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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