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시간을 짧았고 번뇌의 시간은 길었다”

▲ 김영삼 전 대통령. <사진출처=대통령기록관>

[월요신문 김영 기자] 지난 22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영결식이 26일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됐다. 한국 현대정치사를 대변해 온 3김(金) 중 한명이자 군부독재를 끝내고 문민정부 시대를 연 의회주의자 김 전 대통령에게 어울릴만한 영결식 장소였다. 살아생전 YS는 군부의 불의와 폭압에 맞서 민주화를 외쳤고, 대통령에 취임해서는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실시 등 나라 바로 세우기에 전력했다. 그는 또 후진양성에 있어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에서 지역 유지의 아들로 태어난 YS는 해방 직후인 1945년부터 본인의 꿈을 대통령이라 정했다고 한다. 경남중학교(현 경남고등학교) 재학시절 책상에 ‘대통령 김영삼’이라 적어 놓을 만큼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YS와 정치권의 인연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서울대 철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8년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서 입상하며 당시 외무부 장관을 지내던 장택상을 만나게 된 것으로 그후 YS는 장택상의 비서관으로 발탁되며 본격적인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1954년 5월 열린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이기붕의 추전을 받아 자유당에 입당, 고향인 거제에 출마해 첫 금배지를 가슴에 달았다. 당시 YS의 나이는 불과 28세(만 26세)로, 지금까지도 YS는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 YS의 험난한 정치여정이 시작됐다.

자유당 소속임에도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연임에 반대한 그는 ‘사사오입’ 사건이 발생하자 자유당을 탈당한 뒤 민주당에 입당하며 야당 생활을 시작했다.

민주당 후보로 나선 1958년 제4대 총선에서는 부정개표 의혹 속 낙선했고,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총선에서 재선에 올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국회 해산의 아픔을 겼었다.

20대 젊은 나이에 정치에 입문, 단 6년 사이 3번의 총선을 치르며 당선과 낙선 그리고 재당선 뒤 국회 해산을 과정을 고스란히 경험한 것이다.

 

40대 기수론, 잠룡급 정치인으로 발돋움

5.16 군사쿠데타 직후 YS는 윤보선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창당한 민정당에 합류 당 대변인을 맡아 야당의 입으로 활약했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선 젊고 유능하다 소문난 그를 영입하기 위해 창당 예정이던 민주공화당 부산시지구당 위원장직은 물론 정부 소유 서울신문사의 사장직을 제안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그는 군인의 정치참여가 잘못됐다 지적하며 이를 거절했고 1963년 군정연장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질긴 악연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YS의 이름이 정치권은 물론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71년 대선에 나설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하면서 부터다.

신민당 원내총무와 대변인을 지냈던 그는 당내 차기 이렇다 할 대선주자급 후보가 없는 상황 속에서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서며 경선에 출마했다. 그 뒤를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DJ) 및 이철승 전 의원 등 젊은 정치인들이 40대 기수론에 동참했다.

경선은 민주당 구파 출신 YS와 신파 지지를 받던 DJ간 양자구도로 펼쳐졌고 결과는 YS의 패배였다. 이때부터 형성된 DJ와 미묘한 라이벌 관계는 지난 2009년 DJ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어졌다.

 

YH 여공 농성과 23일 단식 투쟁

YS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DJ와 함께 박정희‧전두환 군부와 맞서 싸운 정치 민주화의 상징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 특히 자주 회자되는 사건이 1979년 있었던 YH무역 여공의 신민당 당사 농성과 1983년 민주화추진협회 구성 및 23일간의 단식투쟁이다.

1970년대 들어 신민당 내 강경투쟁파를 이끌던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철폐를 강력히 주장했으며, 그로인해 국내외 적으로 상당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신민당 총재에 다시 오른 1979년 8월에는 신민당 당사를 찾아온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72명을 만나 이들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며 3일간 이어진 철야농성을 진두지휘 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빌미가 돼 YS는 우리 헌정사상 유일한 의원직 제명의 치욕을 당하기도 했는데 당시 그는 “영원히 살기 위해 일순간 죽는 길을 택하겠다” “나를 제명하면 박정희는 죽는다”고 말하며 그 부당함을 알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유신 말년 그가 했던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반드시 온다”는 말은 10.26 사태 이후 인구에 회자되며 YS를 대표하는 명언으로 기억되고 있다.

   
▲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 투쟁 당시. <사진출처=대통령기록관>

YS와 군부 악연은 12‧12 쿠데타로 신군부가 등장하며 계속됐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 속 1년 동안 가택연금을 당했으며, 이후로도 상당기간 정치활동 규제에 묶여 지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신군부 독재에 지속적으로 항거했다. 1983년 3월에는 DJ측과 민주화추진협의회 구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고, 같은 해 5월 18일에는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23일 동안 단식 투쟁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는 우리 정치권 내 최장기 단식투쟁 기록으로 그 이후 YS는 신군분의 정치적 억압에서 일부 벗어날 수 있었다.

 

87년 대선 패배와 3당 합당

민주화에 공로가 큰 YS지만 대권 앞에서 양보가 없었고 욕심이 지나쳤다는 점은 그의 경쟁자였던 DJ와 함께 아직까지 비판 받는 부분이다.

일단 그는 17년 만에 직선제로 치러지게 된 1987년 대선 때 통일민주당 대선 후보 자리를 두고 DJ와 단일화 논의에 착수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개헌이 발표되기 2개월전인 그해 8월부터 양측간 단일화 논의가 진행됐으나 여러 사안을 두고 의견마찰만 빚다 번번히 회담이 무산된 것. 이에 대해 재야인사들 사이에서는 ‘적전분열’이라는 질타가 쏟아지기도 했다.

10월 18일 DJ가 탈당한 뒤로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갈라섰으며, 그로인해 대선에선 여당 후보로 나선 노태우 전 대통령이 어부지리 당선되기도 했다. 군인정권 종식이란 국민적 염원이 YS와 DJ 양김의 대권 욕심 때문에 5년이나 늦춰지게 된 것으로 이에 대해선 두 전직 대통령 모두 과오였다 인정한 바 있다.

   
▲ 3당 합당 후 김영삼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 <사진출처=대통령기록관>

1990년 1월 전격적으로 진행된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 간 3당 합당 또한 YS 정치인생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당시 그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며 군사정권 출신과의 연합에 당위성을 부여했으나, 민주진영 내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좋은 평가는 받진 못하고 있다. 3당 합당 동참이 문민정부의 조기 등장을 위해서라기 보다 대권을 향한 개인 욕심 때문이 아니었냐는 지적이다.

 

하나회 척결 및 금융실명제 실시

3당합당에 따른 비난이 거셌으나 그로인해 YS는 1992년 치러진 14대 대선에서는 비교적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로써 윤보선 전 대통령이후 30여년 만에 문민정부가 대한민국에 들어서게 됐다.

취임 초 YS는 국민적 기대에 부흥하는 개혁 정치를 과감히 실현하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그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해 차명 부정 계좌를 단속 및 처벌했으며, 지방자치제를 전면 실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을 잊는다 명문화했으며,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 철거하기도 했다.

   
▲ 김영삼 전 대통령의 취임식. <사진출처=대통령 기록관>

무엇보다 YS는 국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해 군인의 정치참여 야욕을 뿌리째 뽑아내는데 성공했다.

아울러 그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수사를 실시했으며, 5.17 쿠데타 및 5.18 민주화 운동 진압의 책임을 물어 군사 정권 관계자들을 사법처리했다.

 

IMF 사태와 측근 비리

임기 초 개혁적 정책으로 국정운영 지지율이 90%대까지 올라간 YS였으나 임기 후반기 들어서는 지지율 폭락을 경험하게 된다. 퇴임 직전 지지율은 8.4%까지 떨어졌다.

1997년 1월 한보철강과 기아자동차 등의 도미노 부도사태가 발생하는 등 경제상황이 극도로 악화됐고 그해 12월 찾아온 외환위기로 IMF 구제금융까지 신청했기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에 대한 대중 평가에서 민주화 및 개혁정치의 공로가 큰 YS가 비교적 낮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 역시 IMF로 대표되는 임기 말 과오가 크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YS 재임 기간 중 대한민국이 ‘사고공화국’이라 불릴 만큼 온갖 사건사고로 몸살을 앓았고 그에 앞서 제대로 된 사회안전망을 설치하지 못했다는 점 또한 그의 지지율 하락에 일조했다.

YS 집권 말 불거진 대통령 아들 현철씨의 권력형 비리 의혹 및 여타 친인척 비리 의혹도 그의 명성에 흡집을 냈다.

한편 노태우 전 대통령 등 민정당계 출신 및 일부 야권 인사들은 1992년 대선 전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군부세력 및 기업인들에게서 천문학적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 받았다는 의혹을 줄기차게 제기하기도 했다.

 

신진 정치세력 폭 넓게 기용

재임 기간 중 공과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YS는 3김 시대를 이어갈 후배 정치인 양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본인의 가신집단인 상도동계 인사들의 정치등용을 도운 것 뿐 아니라 대통령 취임 전부터 여러 분야의 능력 있는 젊은 세대를 정치권으로 끌어 들인 것.

이와 관련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68년 정치학을 지망하던 서석재를 발탁해 자신의 비서로 채용했다. 1970년에는 서울대 운동권 출신 김덕룡을 정계에 데뷔시켰다. 1971년 유신 선포 이후에는 김동영, 최형우도 측근으로 발탁했다. 특히 김동영과 최형우는 ‘좌동영 우형우’라 불리며 YS를 평생 곁에서 보필했다.

1986년에는 인권 변호사로 이름이 알려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발탁해 정계에 입문시켰으며, 대통령 집권 이후에는 민중당 출신 이재오·김문수는 물론 제정구, 손학규, 홍사덕 등 재야인사를 민자당으로 영입했다.

이 외도 김 전 대통령 천거로 정치를 시작한 정치인은 이회창, 이인제, 이명박, 안상수, 정의화, 이완구, 홍준표, 오세훈 등이 있다. 그가 발탁한 인사들 중 두명이 대통령직에 올랐고 지난 20년간 보수정당을 이끌고 있는 인재 상당수가 YS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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