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항공기로 시작해 우주선까지 도전

 

[월요신문 이신영 기자] 캐나다 자유당이 10년 만에 정권 교체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차세대전투기 논쟁이 있었다. F35 도입 비용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국론을 분열시킬 만큼 주요 아젠더로 부상했으며, 분노한 캐나다 국민들은 투명성을 앞세운 야당의 손을 들어줬다.

‘캐나다의 오바마’로 불리는 저스틴 트뤼도는 총리 취임 직후 전임 총리의 탄핵 사유가 된 F-35도입을 전격 취소하고 이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이는 국방사업에 있어 높아진 대정부 불신이 정권교체로까지 이어진 사례로, KFX사업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 크다.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은 현재 군수산업 관련 각종 논란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데 있어 국방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 문제는 비용이다. 차세대전투기사업의 경우, 천문학적 예산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상대 업체에 대한 정보와 고도의 협상력이 요구된다. 이에 <월요신문>이 KFX사업 상대업체인 록히드마틴사를 비롯,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군수산업의 현주소를 살펴봤다.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위치한 보잉은 록히드마틴, 노스롭 그루먼과 함께 미국 3대 방위산업체로 손꼽힌다. 우주항공과 방위산업, 민간‧군용항공기, 인공위성 제작을 주 업무로 하는 항공우주 기업이다. 전 세계적으로 임직원 약 16만8000명이 근무 중이며, 데니스 뮬렌버그(Dennis A. Muilenburg)가 사장 겸 최고경영자를 맡고 있다.

시애틀과 롱비치, 세인트루이스 등 미국 전역에 지점과 공장이 있고 세계 곳곳에 해외지부를 두고 있으며 150개국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보잉의 지난해 매출액은 950억달러로 한화로 약 108조7180억원이다. 같은 기간 동안 영업이익은 65억달러(한화 약 7조4386억원), 순이익은 54억달러(한화 약 6조1798억원)을 기록했다. 자산 총액은 전년 기준 991억달러(한화 약 113조4100억원)다.

 

창업주 이름 따 만든 보잉사

보잉은 창립주인 윌리엄 E. 보잉은 세탁소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의 강요에 의해 장사를 억지로 배워야 했지만 좋아하지 않는 일이라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기계공업에 관심이 있었고, 시애틀에서 기계 일을 배웠다. 그는 워싱턴 주에서 부동산사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은 후 재계의 도움을 받아 1916년 보잉의 전신인 ‘태평양 항공기 제작사(Pacific Aero Products Co.)’를 설립했다.

이듬해 자신의 이름을 따 ‘보잉 항공기 회사(Boeing Airplane Company)’로 개명했다. 당시 항공기는 나무로 된 뼈대에 방수천을 덧대어 기체를 만들었는데, 창립자 ‘보잉’이 목재회사에서 근무한 경력과 예일대에서 목재에 대해 공부한 것이 도움이 됐다.

보잉에게 세계대전은 기회였다. 미국이 1917년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자 보잉은 비행기 수요를 예상하고 미리 수상비행기 ‘모델 C’를 개발했다. 이 기체의 우수성이 입증되자 미 해군은 보잉에 '모델 C' 50대를 주문했다.

 

세계대전 거치며 비약적 성장

보잉이 초창기부터 방위사업 부문에 두각을 나타낸 건 아니었다. 1930년대 초 전투기 개발에 참여해 미 육군항공대가 운용한 최초의 단엽전투기 ‘P-26 피슈터’를 개발했다. 미 육군은 이 전투기를 150대 가량 구매에 실천 배치했다.

   
▲ B-17. <사진출처=보잉>

보잉이 방위사업 부문에서 자리매김한 건 'B-17'를 개발하면서부터다. 이 기체는 보잉이 여객기를 제작하며 얻은 대형기체 제작 노하우를 집약해 사활을 걸고 만든 폭격기다. 미군은 제2차세계대전 참전이 확정되자 'B-17'을 대량 주문했다. 이때부터 보잉은 초대형 군수업체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록히드, 더글라스 등과 제휴해 개발한 ‘B-29' 역시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을 상대로 대활약하는 등, 제2차세계대전을 통해 보잉은 중견 항공기 제작업체에서 명실상부한 정상급 폭격기 개발업체로 올라섰다.

1960년대엔 헬리콥터 제작업체 버톨을 인수해, 헬기 개발 사업에도 손을 뻗쳤다. ‘CH-46'과 'CH-47' 등 주요 군용 헬리콥터를 제작했으며, 벨사와 협력해 최초의 틸트로터 수송기 'V-22'를 개발했다.

 

베스트셀러 ‘보잉 737’

이후 보잉은 미국 유나이티드항공에 최초의 현대식 여객기인 ‘보잉 247’ 등을 공급하며 여객사업 확장에 나섰다.

1958년 출시한 ‘보잉 707’은 제트 여객기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 1967년에 선보인 근거리용 제트 여객기 ‘보잉 737’은 보잉의 지위를 세계 항공산업 시장 최고의 자리로 격상시켰다. 단거리 노선에 취약했던 보잉은 단거리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더글러스 DC-9의 대항마로 ‘보잉 737’를 개발했다. ‘보잉 737’은 제주항공, 진에어 등 국내 노선 및 동남아 단거리 노선에 주로 취항하는 저비용항공사(LCC)들이 활용하는 기종이기도 하다. 탑승 가능 승객 수는 140~180여명이다.

   
▲ 보잉 737 맥스. <사진출처=보잉>

‘보잉 737’을 최초로 활용한 항공사는 독일의 루프트한자. 이 회사는 1965년 2월 보잉으로부터 21대의 ‘보잉 737기’를 주문했다. 보잉 역사상 미국 이외 국가의 기업으로부터 신형 항공기를 주문받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보잉에 따르면 지난해 12월까지 ‘보잉 737’의 누적 주문량은 7367대. 지난 한 해 실적만 보면 전체 주문량(1338대) 중 ‘보잉 737’의 비중이 85%(1184대)에 달한다. 보잉에 737 기종은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다. 보잉은 737이라는 날개를 달고 세계 민간항공기 시장은 물론 군용항공기 시장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점보 젯 ‘보잉 747’

장거리용 대형 여객기 ‘보잉 747’도 보잉의 스테디셀러다. 1969년 첫 초도비행에 성공해 46년이 넘는 경력과 신뢰도를 가지고 있다. 보잉 747은 에어버스의 ‘A380’이 개발되기 전까지 ‘세계 최대 여객기’ 타이틀을 37년간 거머쥐고 있었다. 제트 여객기 최초로 2층 구조를 기본사양으로 채택했으며, 500명 이상의 승객이 탑승이 가능한 때문이엇다.

이 기체엔 하늘을 나는 아기 코끼리 ‘점보’라는 재미있는 별명이 붙어 있다. 하지만 보잉은 이 별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코끼리라는 이미지가 ‘보잉 747’은 느린 항공기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실제 이 기체의 공식 순항속도는 마하 0.855(파생모델 ‘보잉 747-400 기준)로 보잉의 여객기 중 가장 빠르다.

미국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VC-25)’도 ‘보잉 747’의 파생모델이다. ‘보잉 747-200B’를 기반으로 제작됐으며, 보통의 여객기와 달리 방탄기능과 EMP방어, 미사일 회피장치 등이 장착돼 있다. 최근 노후로 인해 교체가 확정됐는데, 이 기종도 ‘보잉 747’의 파생모델 ‘보잉 747-8’이다. 대한민국 공군 1호기인 대통령 전용기도 ‘보잉 747-400’ 기종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같은 국가수반 전용기를 사용 중이다.

   
▲ 보잉 747. <사진출처=보잉>

‘보잉 747’은 대한항공과도 연이 깊다. 대한항공은 보잉과 1970년 ‘보잉 747’을 계약하고, 3년 뒤 미주노선에 정식 취항해 태평양 상공을 날았다. 이후 ‘보잉 747’은 대한항공의 얼굴마담으로 활약했다.

 

상업용 유인우주선 사업자로 선정

보잉은 1997년 전투기 개발 강자인 방산업체 맥도넬 더글라스를 합병했다. 이에 ‘F-15’와 ‘F/A-18' 같은 전투기 생산 라인을 보유하게 됐고, 현재 미공군 주력 수송기인 ’C-17‘과 하푼 등 각종 미사일체계도 취급하게 됐다. 또한, 맥도넬 더글라스 산하 ’팬텀 웍스‘라는 연구개발조직을 흡수해 전투기 사업을 강화했다. 이외에도 조기경보기와 공중급유기, 수송기, 대잠초계기 등을 생산해 방위산업 분야에서 정상급 지위의 이미지를 굳혔다.

   
▲ F-15. <사진출처=보잉>

미국의 차세대 전술 전투기 개발 계획(ATF)에선 록히드마틴과 콘소시엄을 구성, ‘YF-22’의 개발에 참여했다. 'F-22'의 후방 동체와 주익, 항공전자장비 통합, 파일럿 훈련 장치, 유지 보수 설비의 개발과 생산을 맡았다.

보잉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첨단산업의 발전과 함께 보잉은 우주 산업 분야에도 진출해 성과를 내고 있다. 2010년 우주여행전문회사 스페이스어드벤처스와 협력해 우주여행사업에 진출한다고 발표했으며 지난해 8월엔 우주선 ‘CST-100'를 공개하고 9월엔 나사로부터 상업용 유인 우주선 사업자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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