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는 4류, 관리 3류, 설비 2류, 고객은 1류”

[월요신문 김미화 기자] 최근 한국경제의 저상장 기조가 장기화되면서 '기업가 정신'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기업가정신은 도전, 혁신, 미래를 보는 안목, 사회적 책임 등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투자가 확대되고 생산과 고용이 늘 수 있기 때문. 즉, 기업가정신이 회복되면 경기도 회복되고 기업가정신이 쇠퇴하면 경기도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되는 셈이다.

<월요신문>은 기업가정신과 한 나라의 경제수준이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고 '열정을 꿈으로 만든 글로벌 CEO 이야기를 연재한다. 열 번째 순서로 대만의 사업가 '궈 타이밍(郭台銘)'의 기업가 정신을 살펴봤다.

   
▲ 궈타이밍 홍아이그룹 회장.

대만 최고 부호인 궈타이밍(65) 회장은 홍아이(鴻海)그룹과 자회사인 팍스콘의 회장이다.

홍아이그룹은 대만 국적의 세계 최대의 전자제품 외주 생산업체다. 현재 이 회사는 애플을 대표적으로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전 세계 다양한 전자 및 IT업체의 상품을 주문자 제조 방식으로 생산하고 있다.

특히 팍스콘은 전자기기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분야에선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기술 수준도 상당해 공동 설계는 물론 공동 개발까지 하는 하이테크 업체로 평가받고 있다.

궈타이밍은 타고난 기업인이다. 샐러리맨으로 사회에 첫 걸음을 내딛은 그는 74년 회사를 창업한 이래 오늘날 13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글로벌기업인으로 명성을 올렸다.

궈타이밍은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71위에 올랐다. 이 성과는 대만 출신 기업인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2013년 포브스지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61억 달러로 대만 4위의 부호다.

샐러리맨, 24세에 창업하다

궈타이밍은 중국 본토 산시(山西)성 출신인 아버지와 산둥성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1950년 대만에서 태어났다. 대만 사회는 그를 '산시성에 뿌리를 둔 외성인(外省人)'으로 분류한다. 외성인은 원래 대만 출신이 아니고 1949년 국민당이 본토에서 근거지를 대만으로 옮길 때 함께 이주한 본토 출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만 중국해사전과학교(현 대만해양기술학원)를 졸업한 그가 처음 시작한 일은 해운회사에서 선박관련 업무를 하는 것이었다. 이후 궈타이밍은 1971년 대만부흥항운공사로 옮겨 무역 업무를 배웠는데, 이 과정에서 무역의 기본이 되는 '상품'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런 그가 창업을 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친구가 외국 기업에서 플라스틱제품을 만들어줄 공장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사업에 도전하게 된 것. 궈타이밍은 어머니가 보태준 10만 대만 달러를 포함해 모은 자본금으로 1974년 플라스틱 제품의 제조와 가공을 주로 하는 '홍하이플라스틱'이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그러나 호기롭게 시작했던 사업은 석유파동을 맞아 플라스틱 제품생산으로는 수익을 낼 수 없게 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궈타이밍은 포기하지 않았다. 은행에서 대만달러 70만불을 빌려 훙하이그룹의 모태인 '훙하이 정밀공업'을 세웠다. 머지않아 전자산업이 유망해질 것으로 보고 TV에 들어가는 고압전기 부품을 생산하는 회사로 업종을 전환한 것이다.

훗날 궈타이밍은 이 시기를 “한파를 견디던 때”라고 회고했다. 그는 “전자에 대해 아는 것은 없는 상황인데다 가끔 깡패들까지 찾아와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뜯어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뚜기 정신

어려운 순간을 넘기고 난 후 궈 타이밍은 새로운 기기를 들여와 공장 설비를 개조하게 된다.

그러나 생산라인에 혁신적으로 바꿨음에도 궈타이밍의 사업은 순탄하지 못했다. TV생산업체가 줄줄이 도산하는 등 업계 상황이 점점 열악해지면서 또 다시 위기가 찾아왔기 때문.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 업종 변경을 시도했다.

당시 궈타이밍이 선택한 것은 미국에서 퍼스널 컴퓨터가 보급되는 것을 보고 컴퓨터 등 전자기기를 연결해주는 기기를 만드는 사업이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연결기 생산 공장인 미국 AMP를 경쟁상대로 삼고 미국으로 향했고, 미국에 분사를 설립하고 최초 자체 상표인 '팍스콘'을 생산했다.

그런 그에게 기회는 1980년 찾아왔다. 미국의 게임 회사인 아타리로부터 게임용 콘솔에 들어가는 조이스틱과 게임기를 연결하는 커넥터를 주문 받은 것이다. 궈 회장은 이를 계기로 낯선 미국을 11개월 동안 돌아다니면서 상당량의 추가 주문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궈타이밍이 부호로 거듭난 계기는 1988년 중국 진출이었다.

그는 1988년 본토의 광둥성 선전에 전자 공장을 세우고 연구개발 인력을 미국과 중국에 8000여 명으로 늘렸다. 지금은 대만 기업의 중국 진출이 일상적이지만 당시로선 한국 기업의 개성공단 진출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리스크를 안고 시작한 사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중국에 오히려 통 큰 투자를 했다. 단순히 생산시설만 건설한 게 아니라 엄청난 숫자의 종업원이 그곳에서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기숙사형 생산단지를 지었다. 종업원들의 숙소와 식당은 물론 진료소까지 마련했다. 생산시설과 생활시설을 결합한 것이다.

하루 16시간 이상 일하는 ‘일벌레’

궈타이밍의 또 다른 터닝 포인트는 전자제품 주문자 제조 방식이다. 그는 방식으로 전 세계 IT기업의 제품을 본격적으로 위탁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는 1995년 델 창업주 마이클 델을 중국 선전으로 직접 초청하여 위탁 생산 계약을 따냈다. 이때만 해도 델은 세계 PC업계의 5위권에도 진입하지 못했었다. 그 후 양사는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어 도약의 날개를 달았다.

1996년 미국 컴퓨터회사인 컴팩의 데스크탑 컴퓨터를 만들 제조라인을 신설하면서 위탁생산업체로 회사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불과 몇 년 안에 미국 굴지의 전자·IT기업인 HP, IBM, 애플과 계약하며 전자제품 제조공장으로 자리잡게 된다. 미국와 유럽, 일본은 IT제품의 개발과 디자인에 주력하고 생산은 팍스콘이 맡는 국제 분업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궈 회장은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기업인이다. 하루 최소 16시간 일하는 그는 간부들을 심야에 불러 보고를 듣고 회의를 여는 일을 다반사로 한다. 궈 회장은 지금도 품질에 최선을 다해 불량품이 나지 않도록 세심한 생산·품질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훙하이가 위탁생산기업이라는 한계를 딛고 급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단순하다. 철저하게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 궈 회장의 경영철학은 고객 제일주의로 유명하다. '인재는 4류, 관리는 3류, 설비는 2류, 고객은 1류'라는 기업 모토처럼 잠재고객을 발굴하고 협력관계를 구축하는데 열성을 다한다. 궈타이밍의 경영철학은 한마디로 “신뢰가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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