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치사에 큰 족적 남긴 ‘미스터 쓴소리’

▲ 고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영정이 영결식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월요신문 허인회 기자]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지난 14일 오후 4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고인이 살아온 발자취는 역동적인 우리 현대사만큼 파란만장했다.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1963년 정계에 첫 입문한 이래 8선의 국회의원을 지내기까지 그는 대한민국 정치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의 호는 청강(靑江)이지만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이 더 유명하다. 평소 원칙에 충실하고 입바른 소리를 잘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좌와 우를 따지는 진영논리는 그의 사전엔 없다. 그는 두차례나 국회의장을 지냈지만 단 한번도 '날치기' 처리를 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리더십을 기려 장례식장엔 수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와 고인의 정신을 기렸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193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민족학교인 대륜중학교(당시 6년제)를 거쳐 1950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해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임관을 10개월 앞두고 생도들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집단처벌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당시 그는 사건에 관련이 없었음에도 생도회장으로 모든 책임을 지고 퇴교하였다. 이후 연세대에 복학한 그는 ‘연대 털보 응원단장’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타고난 부지런함과 열정이 학내 유명인사로 만든 것.

대학 졸업 후에는 동화통신사에 입사, 영어경제판을 만드는 특심부를 거쳐, 정치부기자로 언론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대학선배의 추천으로 동아일보 정치부로 자리를 옮긴 그는 58년 4대 민의원 총선거 재선거에서 불법 개표현장을 취재하다 깡패들에게 몰매를 맞았다. 또한 자유당 정권의 ‘보안법 파동’에 분노, “야! 이 자유당 놈들아. 이럴 수가 있는 거야”라며 기자석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당시 사회를 보던 민주당 곽상훈 부의장이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 조용히 하시오.”라고 주의를 줬다. 그 말은 아직도 국회 속기록에 남아 있다.

기자 시절, 이 전 의장의 이름을 알린 계기는 62년 5·16 군사혁명 직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울릉도 시찰 잠입 취재였다. 박 의장의 울릉도 시찰 소식에 전함 기관실에 몰래 승선하여 단독취재한 일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 때 박 의장을 인터뷰를 하며 그의 자립경제와 자주국방 구상에 매료된 이만섭은 기자생활을 청산하고 정치인이 되어 나라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했다.

 

3선개헌 반대해 살해 위협받아

1년 후, 공화당에 입당한 그는 박정희 당시 대선후보, 이후락 공보실장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선거유세를 나섰고, 제6대 국회에 전국구로 입성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이 전 의장에게 여러 문제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구하기도 하였고, 이 전 의장 역시 직언을 하기도 했다고 그의 회고록에 나와 있다. 이렇듯 신임을 쌓아가던 이만섭 전 의장이 박 대통령과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바로 3선 개헌 반대였다. 박 대통령과의 독대에도 반대의견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퇴진 등 3선 개헌 선행조건을 내세웠다. 이 소식을 들은 김형욱 부장은 부하들에게 이만섭 의원 살해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를 전해들은 박 대통령이 “만일 김 부장이 이만섭 의원에게 손만 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호통쳤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 사건 후 그는 8년간 정치활동 공백기를 맞는다.

80년, 공화당이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자, 공화당 출신 의원들과 ‘한국국민당’ 창당에 관여했다. 5공화국이 출범한지 몇 달 지나지 않은 81년 그는 임시 국회에서 대표연설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과 군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후, 지속적으로 정치활동을 이어 나가며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93년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제14대 국회의장으로 지명됐다.

   
▲ 고 이만섭 전 국회의장 영결식에 참석한 정의화 국회의장. <사진제공=뉴시스>

국회의장에 임명되자 어느 기자가 물었다. “오랜 정치 생활을 하면서 우리 국회가 꼭 고쳐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의 대답은 이랬다. “여당도 해보고 야당도 해보았으니, 양쪽을 다 잘 압니다. 솔직히 말해 꼭 없애야겠다고 생각해 온 것은 바로 국회의 날치기 문제입니다.”

그는 이 말을 실천에 옮겼다. 국회의장이 된 그를 김영삼대통령이 청와대로 직접 불러 예산안 처리를 압박했지만 “국회가 파행돼서는 곤란하다”며 거부한 것. 이후 국회 예결위에서 날치기로 예산안이 통과되고 여당으로부터 본회의 사회권을 부의장에게 넘기라는 압박까지 받자 이 전 의장은 사직서를 써놓고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날치기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당시 이 전 의장은 여야 중재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예산안은 격돌 없이 표결로 통과하였고, 구시대의 상징이던 안기부법, 통신비밀보호법, 정당법은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일로 미운 털이 박힌 그는 이듬해 국회의장직에서 전격 경질된다. 경질 열흘 후, YS와의 조찬 자리에서 그는 “제가 지난번에 날치기 사회를 거부했다고 바꾼 것입니까?”라고 일침을 가했다. 회고록에서 그는 “의장을 한 번 더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3권 분립하의 입법부 수장이 대통령의 기분에 좌우돼 경질되는 이 나라의 풍토가 안타까웠다.”라고 회상했다.

 

YS, DJ 정권시절 두차례 날치기 거부

97년 대선을 앞두고 이 전 의장은 YS의 간청으로 신한국당 대표서리를 맡아 전당대회를 치른다. 하지만 당내 이회창·반이회창 진영간 반목과 갈등이 심화되자 이 전 의장은 탈당을 결행하게 된다. 당시 그가 남긴 탈당의 변은 아래와 같다.

“당의 명예총재와 총재가 노골적인 반목과 대립을 보이고 있는 오늘의 사태는 정당사상 일찍이 없는 일로 국민 앞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오늘의 정치 혼란에 책임을 지고 국민에게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당 상임고문직과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바입니다.”

3년이나 남은 의원직을 미련없이 버린 이 전 의장은 국민신당에 합류하는 정치 모험을 강행했다. 이후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의 대선 패배 뒤 거취를 놓고 고민하던 그는 98년 9월 6명의 국민신당 의원과 함께 여당인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이를 비판하자 그는 “IMF 사태로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나라부터 살려야 한다는 심경으로 국민회의와 떳떳하게 당대당 통합을 하게 된 것”이라는 말했다.

이 전의장은 99년 7월 특검제 도입을 놓고 국민회의와 자민련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자 총재권한 대행을 맡아 수습에 진력한다. 이후 2000년 새천년민주당 소속 전국구 의원에 당선돼 16대 국회에서 두 번째로 국회의장에 오른다. 이때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소신을 지킨다. 2000년 7월, 교섭단체 구성 완화를 위한 국회법 개정안이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에 의해 운영위원회에서 날치기 처리됐지만 그는 본회의 직권상정을 거부했다. 당시 김대중대통령이 전화해 “이 의장, 날치기를 안 하는 것도 좋으나 법대로 표결해서 다수결 원칙은 지켜야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으나 “국회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다”며 원칙을 고수했다.

이후 2002년 2월 국회의장의 당적 보유 금지, 안건 표결 시 반드시 의장석에서 선포, 국회의원의 자유투표제 등 국회법 개정안을 처리해 헌정 사상 첫 무당적 의장이 됐고 현재까지도 이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그는 16대 국회를 끝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국회를 떠났다.

 

정계 은퇴 후에도 ‘미스터 쓴소리’

이만섭 전 의장은 5공 당시 국민당 총재와 97년 대선 이후 국민신당 총재 시절을 제외하고 줄곧 여당 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권력에 편승했다는 일부 비판적 평가가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치권에서 존경받는 이유는 원칙과 소식을 지킨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 의장은 2004년 정계를 떠난 뒤에도 정치권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2012년, 민주통합당 한명숙 전 대표를 향해 "한(恨)의 정치를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고, 이명박 정부 시절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의 ‘밀실 처리’ 논란이 일었을 당시 "이명박 정부의 나사가 완전히 빠졌다"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2012년 대선 당시 정수장학회가 논란이 되자 이 전 의장은 "정수장학회 이름을 바꾸고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올해 초 이명박 대통령 회고록이 논란이 되자 이 전 의장은 “자화자찬과 자기변명에 치중한 것은 황당하다. 재임 중에 그렇게 국정운영을 잘했다고 하면 차라리 국회 자원외교 국정조사 청문회에 당당히 나가서 할 얘기를 하라”고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 전 의장은 박근혜대통령에 대해서는 “마가렛 대처의 강단과 앙겔라 메르켈의 소통, 두 지도자의 인품을 고루 지녔으면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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