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규 월요신문 편집인.

오래 전 최태원·노소영 커플을 만난 적이 있다. 때는 1988년 가을이었고, 장소는 잠실 롯데월드로 기억한다. 당시 두 사람은 갓 약혼한 사이로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흙수저 기자가 금수저를 만나기는 어려운 법. 수소문 끝에 “최태원이 노소영을 데리고 앙드레김 패션쇼에 온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현직 대통령의 딸과 재벌가 맏아들이 공개된 장소인 패션쇼에 정말 올까. 앙드레김은 청와대 영부인들과 교분이 두텁다던데 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등등.

현장에 달려간 기자는 눈을 의심했다. 어디서 많이 본 남녀가 걸어오는게 아닌가. 둘은 팔짱을 끼지는 않았지만 사뭇 다정하게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경호원이 없었다. 이상하다는 생각도 잠깐. 곧장 커플에게 다가갔다.

기자 신분을 밝히자 최태원은 중세 기사처럼 행동했다.(기자의 눈에는 분명 그렇게 보였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그는 약혼녀를 소중한 보물처럼 뒤로 감추고 무슨 일로 그러냐고 따졌다. 기자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노소영에게 물었다. 노소영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뜻밖의 인터뷰 요청에 피할 법한데도 밝은 표정으로 인사까지 건네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당시 대화 내용을 공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28년 전과 지금의 최태원이 아내를 대하는 자세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28년 전 그땐 노소영 호위무사였던 그가 지금은 아내를 내쫓지 못해 안달이 난 속사정이 뭘까.

‘최태원 내연녀’에 대한 이야기가 장안에 화제다. 기업인 최태원이 아니라 자연인 최태원의 부끄러운 고백을 담은 편지 공개 후 사태는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다. 최 회장은 편지를 통해 이혼이 불가역적임을 호소했으나 여론은 싸늘하기만 하다. SK그룹 직원들의 총수에 대한 신뢰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최태원 회장이 회삿돈으로 내연녀에게 아파트를 사줬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할 말을 잃은 상태다.

최 회장은 이쯤에서 물러나야 옳다. 그게 SK직원에 대한 도리이고 선대부터 일궈온 기업을 지키는 길이다. 아내 노소영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최 회장이 3년 전 작성했다는 이혼 소장엔 분노가 넘친다. 아내는 적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헤어져도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

삼성가 맏딸 이부진의 이혼은 최태원의 사례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공통점은 이혼 사유로 성격차이를 내세웠다는 점이다. 부부 중 한쪽이 이혼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점도 같다. 임우재는 이혼 소송에서 패소했지만 항소했다. 그는 끝까지 혼인 생활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노소영도 이혼을 거부하고 가정을 지키고 싶어 한다. 그는 남편의 혼외자식까지 키우겠다고 밝혀 이혼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다른 점도 존재한다. 두 재벌가의 결혼은 시작부터 달랐다. 최태원 노소영 부부의 결합은 ‘정략결혼’ 논란을 낳았지만 이부진 임우재의 결혼 소식은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최태원 노소영은 양가 부모에 의해 맺어졌지만 이부진 임우재는 집안의 극심한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임우재를 향한 이부진의 사랑은 진실했고 흔들림 없었다. 둘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애정의 도피행각도 서슴지 않았다. 부모의 반대를 피해 오지행을 마다하지 않던 두 사람. 그들을 끈질게 좇던 한 기자는 경기도 한 마을에서 마침내 둘을 찾아낸다. 유난히 철쭉이 붉게 피어 있던 그 마을. 구멍가게 앞 파라솔 아래에서 깔깔거리며 캔맥주를 마시고 사랑을 나누던 그들을 보며 차마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3년에 걸쳐 쫓고 쫓기는 끝에 둘은 도피 행각을 마감한다. 딸의 간절한 소망을 가장이 받아들인 것이다. 1999년 8월 결혼식을 올린 그들은 18년 뒤 이혼 법정에 선다. 무엇이 이들을 갈라서게 만들었나. 재벌가에 장가든 평사원은 백년해로 하기가 이다지 어려운가.

나뭇가지는 떨어져 있어도 뿌리가 같음을 안다. 잘려나가는 나뭇가지의 아픔을 아는가. 노소영 관장은 남편 최 회장에게 그렇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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