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그의 삶은 하루하루가 팔만대장경이었다

▲ 고 신영복 교수. <사진제공=성공회대>

인물탐구/고 신영복 교수의 삶과 정신

75년, 그의 삶은 하루하루가 팔만대장경이었다

[월요신문 허인회 기자]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희귀 피부암으로 투병하다 지난 15일 타계했다. 향년 75세. 신 교수는 2014년 암 판정을 받고 병마와 싸웠으나,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면서 끝내 숨졌다. 신영복 교수는 20년간의 수감생활 속에서 느낀 깨달음, 과거 회상과 성찰 등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출간되면서 대중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후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1·2', '강의-나의 동양고전독법', '처음처럼', '변방을 찾아서' 등 폭넓은 저술활동을 했고, 깊은 사색과 통찰 속에 우리 삶과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시대의 지성으로 평가받았다.

1941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한 신영복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육사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을 복역하다 1988년 광복절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이후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중국고전강독 등을 가르쳤고, 1998년 3월, 출소 10년 만에 사면복권됐다. 2007년 정년퇴임을 하고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비정기 강의를 이어갔던 그는 2014년 암 진단을 받으면서 강단을 내려왔다.

삶을 송두리째 바꾼 통일혁명당사건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아니었다면 신 교수의 인생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지 모를 일이다.

신 교수가 감옥에 가게 된 ‘통일혁명당 사건’이란 1968년 통일혁명당의 주도 세력을 검거한 사건으로, 통일혁명당은 김종태가 월북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령·자금을 받고 결성된 혁명 조직이었다. 이 사건의 주범 중 한 명인 김질락은 신 교수의 대학 선배였는데 중앙정보부는 신영복이 김질락에 포섭돼 통일혁명당의 핵심으로 활동했고 통일혁명당 산하의 각종 학생 서클을 운영하면서 반정부 소요를 유발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현역 장교로 육사 교관이었던 신 교수는 군사재판 1·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감옥에 갇힌 그는 한학자 이구영과 감옥에서 한방을 쓰며 한학을 공부했다.

신 교수는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다. 신 교수는 "내가 서도에 진전을 이룰 수 있었던 건 옥중에서였다. 재소자 준수사항, 동상 예방수칙 등 부착물을 붓글씨로 써 붙이는 일이 계기가 돼 교도소 내에 동양화방·서도방이 신설되면서 서예에 상당한 시간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고 밝힌 적 있다.

그가 서체에 관심을 갖은 이유는 내용 뿐 아니라 형식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내용의 절절함이 아닌 그것의 형식, 즉 글씨의 모양에서 매우 중요한 느낌을 받게 된다. 서민들의 정서가 담긴 소박하고 어수룩한 글씨체에 주목하게 되고 그런 형식을 지향하게 된다"고 말했다.

신 교수의 서체는 현판, 비문, 제호 등 다양한 곳에 활용됐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소주 ‘처음처럼’과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비석 받침대다.

신영복 교수의 글씨체를 활용한 소주 '처음처럼'.

신 교수가 성공회대 퇴임 무렵, 두산주류에서 브랜드명과 상표 글씨체로 신 교수의 시 ‘처음처럼’의

제목과 글씨를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요청을 수락한 신 교수에게 두산 측은 감사의 의미로 사례비를 제의했으나 거절했다. 대신 신 교수는 후학을 위해 사례비를 성공회대에 1억의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묘비문도 신영복 교수가 새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어록인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를 신 교수가 기록한 것.

이 밖에 ‘새정치민주연합’에서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꿀 때에 신 교수의 저서 ‘더불어숲’에서 유래했다는 후문도 있다. 야권인사들이 "신 교수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다.

신영복 교수가 쓴 고 노무현 대통령 묘비석. <사진제공=뉴시스>

 

독특한 그의 글씨체는 한글의 형상미를 독특하게 살리면서도 획과 획, 글자와 글자가 서로 기대는 모습으로 '관계'를 중시하고 흑과 백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인간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사상을 상징한다.

미술 사학자 유홍준은 그의 글씨체에 대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모두가 뜻을 같이 하여 북돋는 듯한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신 교수가 유명한 곳에만 글씨를 준 것은 아니다. 지방 작은 초등학교 동창회나 대학 동아리의 제호 등 의미 있는 곳이라면 규모에 상관없이 자신이 글씨를 아낌없이 주었다.

한편,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이 2014년 12월 신영복 교수가 쓴 정문 현판을 교체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돼 논란이 일었다. 2008년 개관 때부터 사용해온 이 현판을 두고 한 보수단체가 “과거 간첩사건 연루자가 썼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체성이 훼손된다”는 민원을 제기한 뒤 교체가 이뤄졌다.

신 교수는 이밖에도 세상을 향한 따뜻한 통찰이 담긴 글과 그림을 대중들에게 소개했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입니다”라는 구절처럼 그가 남긴 ‘공존과 연대, 인간주의’의 가치가 그의 죽음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신영복 교수가 남긴 주옥같은 저서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신영복 교수가 가족에게 보낸 옥중 서신을 모은 것이다. 신 교수의 편지는 계수, 형수, 부모님에게 보내진 것이었지만, 20년 20일 간의 수형 생활 속에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p. 6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p.181

“기다림은 더 많은 것을 견디게 하고, 더 먼 것을 보게 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눈을 갖게 합니다.” -p.275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 혐오에 있습니다." - p.329

『더불어 숲』 - 신영복 교수가 세계 23개국 47개 유적지와 역사현장을 직접 탐사한 뒤 집필한 책이다. 1997년 1년 동안 중앙일보에 '새로운 세기를 찾아서'라는 기획으로 연재된 글들을 엮은 것으로 강자의 지배 논리에 맞서서 공존과 평화의 원리를 지키고 자본 논리에 맞서서 인간의 논리를 지키자는 메세지가 담긴 책. 더불어 사는 것, 존중하는 것, 아픔과 기쁨을 서로 나누는 것, 각자의 최선을 인정하는 것 등 신 교수의 생각과 소신이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아직도 ‘잘 자란다’는 의미에 마음을 쏟을 여력이 없습니다. 경쟁과 효율성 등 사람을 해치고 사람과의 관계를 갈라놓는 일의 엄청난 잘못을 미처 돌이켜 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일찍부터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언제나 후회하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p.268

“우리의 깨달음은 결국 각자의 삶과 각자의 일 속에서 길어 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나마도 단 한 번의 깨달음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결연함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모든 깨달음은 오늘의 깨달음 위에 다시 내일의 깨달음을 쌓아감으로써 깨달음 그 자체를 부단히 높여 나가는 과정의 총체일 뿐이리라 믿습니다.” -p.348

『청구회 추억』 -신영복 교수가 구속되기 전인 1966년 봄날 서오릉 소풍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섯 소년들과의 순수하고 소박했던 만남과 우정을 다룬 책.

신 교수는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재소 당시 ‘청구회 추억’과 그 외의 여러 메모를 휴지에 남겼는데, 이것은 교도소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이라 공책처럼 묶어 몰래 감추어 두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송 통보를 받은 신 교수는, 평소 우호적이던 근무 헌병에게 휴지묶음을 부탁하며 집에 전달해주거나 불가능하다면 당신이 가져도 좋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20년 20일의 기나긴 무기징역은 시작됐고, 휴지묶음은 그 소재를 알 길이 없었다. 출소 이듬해 집에서 휴지묶음이 발견됐고, 정리하여 출판한 책이 『청구회 추억』이다.

“사형이 선고되었을 때 순간적으로 스치는 느낌은 한마디로 ‘공허’였다. 나의 존재 자체가 공동화 되는 상실감이었다고 기억된다. 그리고 너무 짧게 끝나는 생애에 대한 아쉬움이 뒤따랐다. (…)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청구회 어린이들과의 약속이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장충체육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나는 감옥의 벽에 기대어 그들과의 만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떠올렸다. 그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쓰기 시작했다. 하루 두 장씩 지급되는 재생종이로 된 휴지에, 항소이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빌린 볼펜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기록이라기보다는 회상이었다. 글을 적고 있는 동안만은 옥방의 침통한 어둠으로부터 진달래꽃처럼 화사한 서오릉으로 걸어 나오게 되는 구원의 시간이었다.”

『처음처럼』 - 신영복 교수가 쓴 글 중에서 신 교수의 생각을 잘 나타낸 문장이나 구절을 가려 뽑고, 여기에 그림과 글씨를 더해서 만든 책. 그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더불어 숲』 등에서 소개된 잠언들 가운데 가려 뽑은 글 172편, 그림 152점, 붓글씨 36점을 3부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그리고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 '처음처럼' 중에서

“고통이 견디기 어려운 까닭은 그것을 혼자서 짐 져야 한다는 외로움 때문입니다. 남이 대신할 수 없는 일인칭의 고독이 고통의 본질입니다. 여럿이 겪는 고통은 훨씬 가볍고, 여럿이 맞는 벌은 놀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견디는 방법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고독한 고통(苦痛)' 중에서

“바다는 모든 시내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다'입니다. 바다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큰 물입니다. 바다가 물을 모오는 비결은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 두는 데에 있습니다. 연대는 낮은 곳으로 향하는 물과 같아야 합니다. 낮은 곳, 약한 곳으로 향하는 하방연대가 진정한 연대입니다.” -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중에서

“세상 사람들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입니다.” -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갑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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