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룩시장 뒤지고 다니는 가구계의 제왕

[월요신문 김미화 기자] 최근 한국경제의 저성장 기조가 장기화되면서 '기업가 정신'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기업가정신은 도전, 혁신, 미래를 보는 안목, 사회적 책임 등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투자가 확대되고 생산과 고용이 늘 수 있기 때문. 즉, 기업가정신이 회복되면 경기도 회복되고 기업가정신이 쇠퇴하면 경기도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되는 셈이다.

<월요신문>은 기업가정신과 한 나라의 경제수준이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고 '열정을 꿈으로 만든 글로벌 CEO 이야기를 연재한다. 열다섯 번째 순서로 스웨덴의 사업가 '잉그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의 기업가 정신을 살펴봤다.

잉그바르 캄프라드 이케아 창업자.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저렴한 가격과 단순한 디자인으로 전 세계 가구시장을 장악한 이케아. 이케아는 전 세계 42개국 345개 매장을 보유, 지난 2014년 연간 36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등 ‘가구 제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직원 수만 15만명인 이케아는 1300개 협력업체와 함께 무려 1만여 종에 달하는 상품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제공한다. 단순히 가구만 파는 게 아니라 주방기구와 욕실용품 등 각종 생활 소품까지 취급한다. 이케아의 다양한 상품을 소개한 이케아 카탈로그는 매년 2억1200만 권 넘게 발행되며,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다운로드 횟수도 연간 600만 건이 넘는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발행되지만 성경보다 더 많이 읽힌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케아 창업주 잉그바르 캄프라드(90)는 블룸버그통신이 15일 발표한 '블룸버그 억만장자 인덱스(BBI)'에서 9위에 랭크됐다. 8위는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다. 캄프라드는 그러나 ‘재산’보다 기업가로서 ‘사명’에 더 충실하다. 그가 시간이 날 때마다 “이케아의 존재 이유는 고객들에게 더 나은 삶을 영위하게 돕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17세에 이케아 창업

캄프라드는 1926년 3월 스웨덴 알름훌트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지역은 1년의 절반이 눈보라에 휩싸이는 척박한 시골마을이었기에 주민들은 생활력과 자립심이 유달리 강했다. 소년 캄프라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섯 살 무렵 고모의 도움으로 성냥 100갑을 산 뒤 1갑씩 되팔아 이익을 남겼다. 2년 후엔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 엽서, 가방, 물고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상품을 팔았다. 캄프라드는 당시를 돌이켜 “내 핏속엔 장사꾼의 기질이 있었다. 용돈벌이 장사를 경험하다 점점 장사에 일종의 집착 같은 것이 생겼다”고 회고했다.

캄프라드는 17세되던 해 고향 집 앞 창고에서 이케아를 창업했다. IKEA라는 기업명은 그의 이름인 잉그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와 유년시절 농장 이름 엘름타리드(Elmtaryd), 마을 이름 아군나리드(Agunnaryd) 앞 글자를 따 I, K, E, A로 정했다.

처음에는 액자나 지갑, 시계, 장신구 등 저가 위주의 잡동사니를 취급했지만 5년이 지나면서 가구 전문으로 탈바꿈한다. 그가 가구로 승부를 걸겠다고 나선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스웨덴 정부가 주택 100만 채 건설 정책을 발표하자 가구 수요 팽창을 예견한 것.

예견은 적중했다. 캄프라드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조립식 가구 최초 시도

1951년 이케아의 한 디자이너가 탁자와 씨름을 벌였다. 차 트렁크에 탁자가 들어가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던 것. 그는 결국 네 다리를 떼어낸 채로 차에 실었고 집에 도착해서 탁자를 다시 조립했다. 이를 지켜본 캄프라드는 무릎을 쳤다.

“바로 저 것이야! 쓸데없이 크기만 한 가구를 줄이자. 실용적이고 단순하게.”

이케아의 플랫 팩(flat pack, 납작한 상자에 부품을 담아 팔고 이를 소비자가 직접 조립하는 가구) 형태의 가구는 그렇게 탄생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신개념 가구는 시장에 내놓자마자 미친 듯이 팔려나갔다.

1958년 캄프라드는 또 한번 혁명적 발상을 시도한다. 바로 ‘가구 전용매장’이다. 가구 전용매장이 무슨 혁명적 발상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다. 오늘날 이케아 매장을 상상하면 금세 이해할 수 있다. 가구만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토털 개념의 복합가구 매장이다.

놀라운 것은 이런 생각을 60년 전에 했다는 사실이다. 캄프라드 나이 32세 때였다. 당시 캄프라드는 도시 외곽에 대규모로 창고형 매장을 건설했다. 그리곤 고객들이 편안하게 앉거나 쉬면서 가구를 고를 수 있게 했다. 운송비와 조립비가 줄인 만큼 가구의 가격도 낮아졌다. 그러자 스웨덴 소비자들이 이케아 가구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해외 진출과 스위스 이주

이케아의 저가 전략은 다른 가구업체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경쟁자들은 이케아에 납품하는 하도급업체를 협박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가구 박람회 때도 이케아에게만 공간을 주지 않았다. 왕따 기업 신세가 된 것이다.

캄프라드는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그는 국내 사업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판단, 폴란드로 눈을 돌렸다. 폴란드는 스웨덴보다 인건비와 땅값이 훨씬 쌌다. 이케아는 이를 이용해 제조 단가를 더 낮출 수 있었다.

폴란드 다음으로 인접국인 독일을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독일 사업이 번창하면서 이케아는 전세계로 눈을 돌린다.

캄프라드는 해외 점포 확장에 박차를 가하면서 고향 아군나리드에 있던 이케아 본사를 네덜란드 델프트로 옮겼다. 이유는 세금 때문이다. 스웨덴 정부는 캄프라드의 소득 중 60%를 세금으로 부과했다. 그는 재산세를 줄이기 위해 1976년 스위스 로잔 교외의 에팔링주로 주소를 옮겼다.

캄프라드는 그러나 아내와 사별 후 스웨덴으로 돌아왔고 30% 정도의 소득세를 냈다. 이는 지난 14일 방송된 JTBC '비정상회담'에서 스웨덴 올라 하칸슨이 밝힌 것이다. 올라는 “스웨덴에서는 일정 금액 이상의 수입을 올리면 60%까지 소득세를 낸다"고 설명했다.

지독한 구두쇠 경영자

캄프라드는 지독한 구두쇠로 유명하다. 그는 아직도 전차나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심지어 한국의 경로우대증에 해당하는 시니어 시티즌 증명서를 보여주면서 할인받는 것을 좋아한다. 주말에는 낡은 볼보를 몰고 다니고 비행기를 탈 때는 이코노미석을 이용한다. 호텔도 5성급 이상은 찾지도 않고 작은 객실을 선호한다.

캄프라드의 구두쇠 정신은 이케아 직원에게도 통용된다. 이케아 직원들은 반드시 양면지를 사용해야 한다. 직원들은 400km 이내 출장시 비행기를 탈 수 없다. 비행기 이용시엔 이코노미석을 타야 한다.

다음은 널리 알려진 일화 한토막.

이케아의 한 임원이 일등석을 타기 위해 캄프라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원은 “이코노미석이 다 팔렸고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약속이라 당장 출발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캄프라드는 “이케아에 일등석은 없소. 비행기를 못 타면 자동차를 이용하시오.”라고 거절했다.

재산에 비해 너무 구두쇠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당당하다. 캄프라드는 “이건 내 삶의 원칙이다. 나는 돈 문제에선 아주 짠 사람이고 빈틈을 보이는 것도 싫다. 기업가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라고 잘라 말한다.

캄프라드는 저서에서 자신이 구두쇠를 고집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그렇게 절약해야 고객에게 한 푼이라도 싸게 팔 수 있다. 경비 절감은 원가 절감으로 이어지고, 원가 절감은 제품의 가격을 낮출 수 있다는 얘기다.

둘째, 이케아의 미래를 위해 항상 자금을 비축해야 한다. 그 돈으로 신흥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

셋째, 아낀 돈으로 남을 도울 수 있다.

친나치 행적 사과, 탈세 논란도

어두운 면도 존재한다.

젊은 시절 캄프라드는 친(親)나치 조직에 가담해 활동했다. 이런 사실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50년 뒤 밝혀졌다. 캄프라드는 “젊었을 때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사과했다. 이케아 내 유대인 동료들에게도 용서를 빌었다.

이케아가 저가 전략을 유지하기 위해 제3세계 아동노동을 착취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1994년 스웨덴의 한 방송사는 파키스탄 아이들이 저임금을 받고 이케아의 양탄자를 짜는 장면을 방영했다. 이후 여론이 악화되자 이케아는 아이들을 의무적으로 학교에 보내는 조건으로 납품업체와 계약할 것이라고 밝혔다.

탈세 행위도 도마에 올랐다. 캄프라드는 이케아가 성장하자 영리단체인 ‘잉카홀딩’과 비영리단체인 ‘스티슈팅 잉카재단’이 동시에 이케아를 지배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이케아가 자신이나 가족이 아닌 재단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11년 캄프라드는 잉카 홀딩스와 독립적으로 로열티를 관할하는 인터 이케아 시스템이라는 자회사를 네덜란드에 만들었으며, 이 회사를 지배하는 상위의 회사인 인터로고 재단이 리히텐슈타인에 위치한 사실이 드러났다. 리히텐슈타인은 조세피난처로 유명하다.

이에 따라 이케아가 전세계 매장에서 벌어들이는 판매 대금의 3%가 로열티 명목으로 인터로고 재단과 인터 이케아 시스템으로 흘러 들어왔고, 탈세로 이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캄프라드는 경영 일선에서 은퇴하고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긴 상태다. 탈세 논란에도 불구하고 캄브라드는 이케아의 고문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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