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반대 이어 한국은행도 반대 입장 밝혀

박근혜대통령은 지난 26일 주요 언론사 편집국장 오찬간담회에서 “한국판 양적완화 정책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사진출처=뉴시스>

[월요신문 허창수 기자] 양적완화를 놓고 정치권의 논쟁이 달아오르고 있다. 박근혜대통령이 지난 26일 주요 언론사 편집국장 오찬간담회에서 “한국판 양적완화 정책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발언한데 대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박대통령이 양적완화가 뭔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이후 ‘양적완화’는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에 오르는 등 국민적 관심사가 됐다.

양적완화란 정책 금리가 0에 가까운 초저금리 상태에서 중앙은행이 통화를 공급해 신용경색을 해소하고 경기를 부양시키는 통화정책을 말한다. 이는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조절하여 간접적으로 유동성을 조절하던 기존 방식과 달리, 국채나 여타의 금융자산을 매입하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시장에 통화량을 늘리는 정책이다. 궁극적으로 자국의 통화가치를 하락시켜 수출경쟁력을 높이려는 목적도 있다.

양적완화는 일본에서 가장 먼저 시행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제로금리시대로 들어선 일본이 더 이상의 경기부양수단이 없자 2001년 3월 일본중앙은행이 장기국채를 매입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이것이 양적완화의 시작이었다.

양적완화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다시 부활했다. 벤 버냉키 당시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이른바 ‘버냉키식 양적완화’를 도입하는데 연준이 사용한 공식 명칭은 ‘대규모 자산매입(large-scale asset purchase)’이었다. 일본의 양적완화가 통화 공급을 증가시키는 것이 주된 목표였던 반면 미국의 양적완화는 장기금리 축소를 위한 수단으로 장기국채와 주택담보부 증권매입에 초점을 맞췄다.

반면 한국판 양적완화는 일본이나 미국의 양적완화와 개념 자체가 다르다. 새누리당이 공약으로 내건 한국판 양적완화는 경기부양을 목표로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은행의 채권과 주택저당증권(MBS)을 매입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러한 방안은 중앙은행이 공개적인 시장에서 채권을 매입하는 주요 선진국들의 완화정책과 달리 한은이 특정 채권을 직접 사들이도록 하는 측면 등에서 논란이 제기돼 왔다.

이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국의 경우 ‘양적완화’보다는 ‘한은특별금융’이나 ‘금융중개지원대출’으로 부르는 게 더 적절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모든 경제주체를 대상으로 돈을 푸는 방식이 아니라 특정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19일 한국은행 이주열 총재 역시 금융통화위원회 이후 가진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일반적인 양적완화는 제로금리까지 내려가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통화량을 늘리는 정책이다. 반면 최근 논의된 한국형 양적완화는 기업구조조정 지원에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사용한다는 의미로 일반적인 양적완화와는 분명히 다르다”고 말했다.

양적완화는 실패한 정책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의 국가가 양적완화를 시행했지만 기대와 달리 실물경제 회복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하고 금융시장 불안이나 신흥국의 자본 유출입 변동성 확대 등과 같은 부작용이 발생했다. 공급과잉이나 수요부족 등과 같은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적완화 정책이 부유층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결과 불평등만 키웠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 26일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학교 교수는 블룸버그 TV와의 인터뷰에서 “양적완화는 낙수 이론(trickle-down)에 따른 경제 정책의 일종이다”며 “이로 인한 자산 가격의 상승은 오직 사회에서 가장 부유한 계층에게만 영향을 준다”고 지적했다.

한국형 양적완화는 지난 4.13총선 당시 새누리당에서 처음 필요성이 제기된 후 주요 국정 현안으로 부상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 당은 ‘양적 완화’를 반대하는 입장이고 정부 여당은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부가 생각하는 양적완화는 ‘외과 수술식 양적완화’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에서 확인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28일 “기업 구조조정을 차질 없이 성공적으로 추진하려면 구조조정을 집도하는 국책은행의 지원 여력을 선제적으로 확충해 놓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이어 “구조조정을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은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선진국들이 펼친 ‘무차별적인 돈 풀기’ 식의 양적완화가 아닌, 꼭 필요한 부분에 지원이 이뤄지는 선별적 양적완화 방식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시했다.

정부가 직접 나서 한국형 양적완화를 추진하려는 이유는 기업구조조정을 위한 자본 확충의 필요성이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준금리 인하와 같은 전통적 방식을 사용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가계부채 악화나 자본유출 등의 부작용은 피하면서도 전통적 방식의 양적완화와 동일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반면 한국형 양적완화에 대한 반대 여론도 거세다.

야당은 구조조정을 위한 자본 확충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현재 우리나라가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야 할 정도의 위기상황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현재 한국은행의 기준금리는 1.5%로 금리를 더 낮출 여지가 있고 추경 카드도 있는 만큼 양적완화정책을 펼 단계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구조조정에 필요한 자금 마련 목적이라면 굳이 발권력을 동원하지 않고 재정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한국은행 윤면식 부총재보는 29일 발표한 통화신용정책 보고서 설명회에서 "기업 구조조정 지원을 위해 국책은행에 자본금 확충이 필요하다면 이는 기본적으로 재정의 역할이다.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활용해서 재정의 역할을 하려면 국민적 합의 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해 사실상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이성태 전 한국은행 총재도 한국형 양적완화에 반대했다. 이 전 한국은행 총재는 27일 언론 인터뷰에서 “경제가 어려우면 중앙은행이 ‘무슨 짓이든 못하겠느냐’에서 출발한 것이 한국판 양적완화다. 그래서 한국형 양적완화는 개발시대의 정책금융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이 전 총재는 이어 “정부가 산업은행 채권을 인수하면 재정건전성 악화 등의 문제가 제기되니 한국은행더러 대신 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실이 명확한 특정 산업이나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발권력을 동원해서는 안된다. 양적완화의 원조 격인 일본도, 미국 연방준비제도나 유럽 중앙은행도 특정 산업에 국한해 돈을 주지는 않았다. 그것이 중앙은행의 최후의 양심이기 때문이다”라고 경고했다.

이 전 총재는 양적완화로 야기될 소득과 재산의 불균형 문제도 경고했다. 이 전 총재는 “양적완화로 당장의 위기를 넘길 수는 있다. 문제는 양적완화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심각한 소득 불균형이나 유동성 회수에 따른 사회적 고통에 대해서는 성찰이 없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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