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패경영 신화를 이뤄낸 ‘경영의 신’

[월요신문 김미화 기자] 최근 한국경제의 저성장 기조가 장기화되면서 '기업가 정신'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기업가정신은 도전, 혁신, 미래를 보는 안목, 사회적 책임 등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투자가 확대되고 생산과 고용이 늘 수 있기 때문. 즉, 기업가정신이 회복되면 경기도 회복되고 기업가정신이 쇠퇴하면 경기도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되는 셈이다.

<월요신문>은 기업가정신과 한 나라의 경제수준이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고 '열정을 꿈으로 만든 글로벌 CEO 이야기를 연재한다. 열일곱 번째 순서로 일본의 사업가 '이나모리 가즈오(稲盛 和夫)'의 기업가 정신을 살펴봤다.

 

교세라그룹 창립자 이나모리 가즈오(84) 회장은 ‘살아 있는 경영의 신’으로 불린다. 27세에 교토세라믹을 창업해 세계 100대 기업으로 키웠고, 파산한 일본항공(JAL)에 ‘구원투수’로 투입돼 1년 만에 회사를 회생시킨 때문이다.

그는 또 일본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부에 대한 집착보다 인간 중심의 경영을 실천해온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일본항공 구조조정 당시 정리해고된 직원들을 일일이 만나 “미안하다. 회사를 반드시 살려내 복직시키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이나모리는 1932년 일본 가고시마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 결핵을 앓았던 그는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해 중학교 시험에 2번이나 떨어졌으며, 지망했던 대학교도 낙방해 신설된 지방대에 들어갔다.

지방 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취업도 쉽지 않았다. 대학 은사의 소개로 겨우 소규모 전기공업사에 입사했으나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당시 그는 짚을 엮어 만든 낡고 허름한 기숙사에서 살며, 생활고에 시달렸으나 좌절하지 않았다. 입사 동기들이 하나 둘 회사를 그만두는 상황에서도 그는 연구에 몰두했다. 그런 노력 끝에 일본 최초로 세라믹 고주파 절연재료를 처음으로 개발해 냈다. 입사 2년만의 쾌거였다.

이나모리는 회고록 <바위를 들어올려라>에서 “만약 처음부터 좋은 일자리와 환경에서 근무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회고록에는 이런 구절도 나온다. “씨름판 경계 쪽으로 질질 밀려가던 선수가 갑자기 용을 쓰며 상대방을 씨름판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 정도로 힘이 센데 왜 씨름판 가장자리로 아슬아슬하게 밀려갔는지 의문이다.” 이는 매사에 전력을 다하라는 그의 철학이 배인 것이다.

27세 때 사업에 도전

그가 사업에 뛰어든 것은 27세 때였다. 반듯한 사무실도 없이 교토 변두리의 한 창고를 빌려 시작했다. 가진 돈은 300만 엔이 전부였다. ‘교토세라믹주식회사’는 그렇게 출발했다.

그는 제품 개발을 하면서 직접 영업 일선에 나섰다. 히타치제작소, 도시바, 미쓰비시전기, 소니, 일본전신전화공사 등 유명회사를 찾아가 “고주파 절연재료를 개발했으니 한번 써보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름 없는 회사 제품을 선뜻 받아주는 곳은 드물었다.

이때 그는 외국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만 해도 일본 대기업은 미국에서 기술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토세라믹이 개발한 제품을 미국업체들이 사용하면 일본 대기업들도 따라 구매할 것으로 생각해 미국 업체를 찾아다닌 것. 수년간에 걸친 노력을 서서히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1964년 홍콩의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에서, 이듬해엔 미국의 페어차일드 등에서 주문이 들어온 것. 당시 세계 1위 컴퓨터회사인 IBM은 IC용 직접회로기판 2500만개를 주문했다. IBM이 요구한 품질 기준은 매우 까다로웠다. 교토세라믹은 7개월만에 그 기준을 통과시켜 납품에 성공했다.

교토세라믹의 제품이 IBM의 주력 컴퓨터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의 전기 제조업체에서 수주가 밀려들었다. 이때부터 교토세라믹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한다.

이나모리는 1982년 10월 회사명을 ‘교세라’로 바꿨다. 현재 교세라그룹은 국내외 226개 계열사에 6만8185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며, 세라믹을 비롯한 전자기기·정보기기·태양전지·디지털카메라 등 전자·통신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나모리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4년 싸고 질 좋은 통신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다이니덴덴사(KDDI)를 설립했다. KDDI의 주력사업은 이동통신, 유선통신, 무선정보, 고속통신망, 위성전화, 인터넷폰 등 정보통신서비스로, 현재 일본 모바일 시장의 약 30%를 점유하고 있다.

이나모리 회장이 기업가로서 위대함은 일본공항 신화에서 증명된다. 2010년 당시 국영기업이던 일본항공은 방만 경영 끝에 부도 사태를 맞았다. 당시 일본항공의 부채는 2조3221억엔으로, 회생 불가능한 상태였다. 다급해진 일본정부는 이나모리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나모리 회장은 선뜻 응한다. 무보수 경영을 선언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재생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본항공을 살려냄으로써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본 기업과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인생의 마지막 책무라고 생각했다”

1년 뒤 기적이 일어났다. 그가 일본항공 경영을 맡은 지 1년 만에 1884억엔의 흑자를 낸 것이다. 일본항공은 2년7개월 뒤 도쿄증시에 재상장했다. 그런 뒤 그는 표표히 일본항공 회장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일본항공의 부활 요인으로 “무엇보다 경영목표를 명확히 했다. 직원들이 의욕을 갖고 일하면 이익이 불어나고 결과적으로 주주에게 과실을 돌려줄 수 있다는 믿음을 줬고, 직원들이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메바경영과 카르마경영

그가 주장하는 ‘아메바 경영’과 ‘카르마 경영’도 창업을 꿈꾸는 미래의 기업인이 새겨들을 대목이다.

‘아메바 경영’과 ‘카르마 경영’은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모두에게 보람을 느끼도록 고안됐다. 아메바 경영은 회사 전체를 독립채산이 가능한 조직으로 운영함으로써 모든 사원이 중소기업 경영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카르마 경영은 불교식 인과응보 철학이 반영된 경영론이다. 그 밑바탕에 이타심이 있다.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 인간은 결코 존경받는 기업인이 될 수 없다. 이타심을 갖고 직원을 대하면 조직이 물흐르듯 잘 운영된다는 뜻이다.

그의 이런 경영철학은 1983년 설립한 ‘세이와주쿠 경영아카데미’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 후세대 창업자인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시게다 야쓰미쓰 히카리통신 사장 등이 이 아카데미를 통해 배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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