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규 월요신문 편집인.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접했을 때 영국 작가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이 떠올랐다. 파리대왕은 1954년 출간됐고 채식주의자는 2004년 출간됐다. 반세기가 지났지만 두 작품은 시공을 초월해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에 내재된 폭력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끊임없이 질문하고 써내려간 점도 같다. 그런데 윌리엄 골딩은 ‘성악설(性惡說)’에 가깝고, 한강은 폭력성에는 진저리를 치면서도 인간 본성의 선함을 믿는 쪽인 것 같다. 그 근거는 작품 속에서 발현된다.

‘파리대왕’은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원시의 야만 상태로 퇴행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소설 속 주인공은 성인이 아니라 어린 소년들이다. 여기에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도 얼마든지 폭력과 광기의 주체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 윌리엄 골딩은 다른 작품에서도 끊임없이 이 주제를 다뤘고 “벌이 꿀을 만들어내듯이 인간은 악을 만들어낸다"는 경고 메시지를 던졌다.

‘채식주의자’에서 주인공 영혜는 그 자신이 나무가 돼버리겠다, 내 안의 폭력성을 깡그리 비워버리겠다며 몸부림친다. 인간 존엄성을 향한 치열한 몸부림이자 선(善)을 향한 발로다.

인간에게 이 주제는 영원한 화두다. 지구라는 별에 인간이 모여 번식을 시작한 이래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 주제를 놓고 깊이 고민했다. 중국의 맹자(孟子)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고, 전국시대의 사상가 순자(荀子)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다. 맹자는 인간은 태아 때부터 선한 마음을 갖고 태어났다고 본 반면.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탐욕으로 가득해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싸움이 발생하고 사회 혼란, 국가간 전쟁으로 이어진다고 봤다.

순자의 활동 연대는 기원전 230년 무렵이다. 그후 2500년 동안 인간의, 인간에 의한 살육과 전쟁이 끊임없이 반복돼 온 점을 감안하면 순자의 혜안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오늘은 5·18 민주화운동 36주년을 맞는 날이다. 집단에 의해 가해진 폭력은 두고 두고 트라우마를 낳는다. 근본적인 치유는 용서와 화해다. 하지만 5•18의 진실은 아직도 안개 속이다. 1980년 5월 18일 그날 청와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민을 향해 총을 쏘라고 최초로 명령한 자가 누구인지 전혀 규명되지 않았다.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가 없는 현실은 ‘용서’를 어렵게 만들고 ‘화합’도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5·18민주화운동은 현재진행형이다.

한강은 집단에 의한 폭력성도 다뤘다. 한강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이다. 집단은 신군부로 통칭되는 공수부대다. 이 소설을 읽은 한 독자는 블로그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이 독자는 장교 출신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자 많은 사람들은 민주화를 기대했다. 대학생들은 연일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민주화 열기를 일시에 뒤덮을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 대상이 광주였을까. ……마음이 아파도 알 것은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반드시 읽어야 한다. 그래서 그 날의 실상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한다. 

저작권자 © 월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