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 저널 “기업과 가계, 오히려 지갑 닫아”

▲ <사진제공=뉴시스>

[월요신문 허인회 기자] 일본과 유럽 등이 전격적으로 도입한 마이너스 금리가 역효과를 내고 있다. 의도했던 정책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8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럽과 일본은 경기 부양을 위해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다. 하지만 정책 결정권자들을 머쓱하게 하는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소비자와 기업들이 지갑을 여는 대신 돈을 감춰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유럽 중앙은행은 2014년 기준 금리를 0%로, 일본중앙은행은 지난 2월 -0.1%로 기준 금리를 전격 인하했다.

경제이론상 저금리는 기업과 가계의 저축 혹은 안전자산 투자를 억제해 소비를 활성화하게 만든다. 소비는 상품 수요를 창출하고 물가하락을 막아 궁극적으로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학설이다.

저금리는 단순히 소비 진작만 겨냥하고 있지 않다. 유럽과 일본은 수출 증대와 물가 상승을 위해 유로화와 엔화 약세가 필요한데 저금리가 그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 중인 유럽, 일본, 비 유로존 국가인 덴마크, 스위스, 스웨덴의 저축률이 OECD가 저축률을 집계한 1995년 이후 가장 높게 나왔다. 특히 독일 가구의 작년 가처분 소득 저축률은 2010년 이후 최고인 9.7%에 달했고 OECD는 올해 독일의 저축률이 10.4%로 더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OECD는 스위스 20.1%, 스웨덴 16.5%, 덴마크는 8.1%의 저축률을 기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사상 최고 수준이다.

일본 가구의 올해 저축률은 2.1%로 2년 전 마이너스에서 큰 폭으로 상승했다. 반면 마이너스금리를 도입되지 않은 미국과 영국의 1/4분기 경제 성장률은 유로존이나 일본보다 낮지만 저축률은 안정적인 수준이거나 약간 낮아지는 추세다.

기업도 투자 대신 현금 보유를 확대하고 있다. 일본중앙은행에 따르면 비금융계 일본 기업들의 1분기 현금 및 예치금은 전년 동기 대비 8.4% 올랐다. 1990년대 이후 가장 높은 증가폭이다.

무디스에 따르면 유럽, 중동, 아프리카 비금융계 회사들의 2015년 12월 기준 현금 잔고는 전년 대비 5% 증가했다. 수익 대비 현금 잔고 비율도 2014년 13%에서 15%로 올랐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일부 전문가들은 마이너스 금리가 의도하지 않은 심리적 효과가 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이너스 금리 정책이 사람들에게 어두운 경기 전망을 암시하거나 통화당국이 현 상황을 충분히 관리할 능력이 없다는 신호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스웨덴 SEB은행의 칼 해머 선임 외환 투자전략가는 “마이너스 금리는 소비자들에게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신호를 전달하고 있다. 마이너스 금리는 위기상황에서 쓰는 수단이다”이라고 주장했다.

앤드루 쉬츠 모건스탠리 수석투자전략가는 “사람들은 미래를 확신할 때 더 많은 돈을 쓰는데 마이너스금리 정책은 사람들이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마이너스 금리가 시장에 대한 불안감을 키워 저축률이 높아지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일본 도시사대 경제학 교수 노리코 하마도 같은 의견이다. 그는 “일본중앙은행은 사람들의 행동을 예측하는데 실패했다. 저축이 늘어나는 것이 지극히 이성적인 일”이라고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비판했다. 실제로 마이너스 금리를 단행했던 2월 일본의 가계 지출은 1.2% 상승했지만 이후 4달 연속 떨어진 바 있다.

유럽중앙은행 집행위원 이브 메르시는 지난 6월, 평균 수명 연장과 마이너스 금리와의 상관관계를 거론하기도 했다. 그는 “평균 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현재의 부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저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이 상황에서 마이너스 금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저축을 하도록 유도했을 수 있다”고 밝혔다.

경제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들의 반응도 이를 뒷받침한다. 스웨덴 스톡홀름에 살고 있는 라스 보흐만(63)씨는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마이너스 금리라는 개념 자체가 이상하다. 나는 소비하기보다는 퇴직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저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계속 은행에 저축할 것이다. 아니면 집안 카펫 아래에 돈을 숨길 것"이라고 말했다.

저축 성향이 강해진 것이 마이너스 금리 때문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저유가, 저성장으로 물가상승률이 낮게 유지되면서 생긴 여윳돈으로 저축을 한다는 것이다.

유럽중앙은행총재 마리오 드라기는 “인플레이션을 감안해도, 오늘날 저축으로 돈을 버는 사람의 비율이 1990년대 평균보다 높다”고 밝혔다. 마이너스 금리에 상관없이 저축 비중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얘기다.

마이너스 금리의 효과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소비성향이 강한 대출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유럽중앙은행 선임 이코노미스트 피터 프라옛은 “초저금리는 채무 변제 비용을 줄이기 때문에 대출자들의 가처분 소득이 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금리를 더 낮춰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미시건대 경제학 교수 마일스 킴볼은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수준보다 더 큰 폭으로 금리를 낮춰야 한다. 사람들이 마이너스 금리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효과적으로 마이너스 금리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 중앙은행의 무능력 때문이지 정책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저작권자 © 월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