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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선 방송통신대 교수(헌법학)

1948년 헌법을 무어라고 부르는가? 요즘은 '제헌헌법'이라고 많이 지칭하는 것 같다. 그런데 1980-90년대에는 '건국헌법'이라는 호칭이 더 많이 쓰였다. 그것은 당시의 제일 유명했던 두 분의 헌법학자, 김철수교수와 권영성교수의 헌법학 책에서 서로 다르게 쓰였기 때문이다. 김교수는 '제헌헌법'이라 했는데, 권교수의 경우에는 제헌헌법의 어법을 문제 삼았다. 다시 말해 '헌법을 제정하는 헌법'이라는 '제헌헌법'의 용례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건국헌법'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래서 많은 법학도와 수험생들이 약 20년 동안 '건국헌법'이라는 용어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요즘은 다시 건국헌법보다는 제헌헌법이 일상화된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이명박정부 시절에 8.15기념식을 '건국절' 행사로 치르겠다고 해서 야당의원들이 일제히 경축식 참석을 거부하는 사태에서 연유한다. 이후 건국절을 어떻게 보느냐하는 것이 진보와 보수의 시금석처럼 되어 버렸다. 보수 시각을 가진 사람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일부터 대한민국이 출범했으니, 그날을 건국절로 보자는 데에 별반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보의 입장에서 보면 그날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집단이 미국의 비호아래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한 날이기 때문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대신에 진정한 건국은 1919년 3.1운동이나 상해임시정부 수립일이 건국일이라고 한다. 후자의 주장은 헌법전문을 근거로 삼고 있다.

1948년의 헌법 전문을 보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대한민국의 건립 즉 건국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한편 1987년 이후의 현행헌법 전문은 표현은 약간 달라져,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계승하고"로 되었다.

그런데 1919년을 기산점으로 하는 것은 일상용례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헌정 68년으로 하지, 헌정 97년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분명 1919년은 우리 헌정사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해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때부터 국가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그리고 48년 헌법의 전문을 정독해보면,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처럼 '재건'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히 선거된 대표로써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고 맺는다. 즉, 과거 임시정부 헌법을 개정하는 형태가 아니라 새로운 헌법의 제정을 명시한 것이다. 또한 8.15 독립 이후에 여운형 선생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고, 조소앙선생은 41년 '건국강령'을 제시해 독립이후의 국가체제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두 분 모두 임시정부의 핵심인물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 분들도 이전의 임시정부와 새로이 구성될 국가는 성격이 다른 것임을 전제로 한 작업이었다고 보인다. 물론 이 분들은 독립 이후 새로운 국가는 분단국가가 아닌, 전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는 그런 국가를 염두에 둔 건국을 꿈꾸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건국절 논의는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 모두가 혼화일체가 되어 즐겁게 되는 가운데 합의되어야 할 사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헌법의 중요성이다. 한 국가의 성립은 헌법의 제정과 그 발효로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1948년 7월 12일에 국회(당시는 헌법제정회의)를 통과하고, 7월 17일에 공포되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국민의 보통선거를 거쳐 제정에 이른 헌법의 주권적 권위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의 시작은 헌법의 발효일이 되어야 온당하다. 그런데 우리는 헌법이 공포된 이후에 다시 약 1개월간의 미군정이 존속한 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함으로써 헌법효력의 공백기를 인정하게 되었다. 정부수립일은 대외용이라 해야 온당하고, 우리 국민의 결의를 존중한다면 7월 17일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제헌절은 지금 경시되고 있는 국경일로 남아있다.

헌법과 국가출범과의 바람직한 관계는 인도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도는 사실상 수백 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를 경험한 후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난 2년 후인 1947년 8월 15일(우연의 일치로 우리와 같다)에 독립했다. 독립이 늦어진 것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라는 문제가 얽혔기 때문이다. 인도의 국민회의는 독립이 임박한 시점에 헌법제정회의를 구성하고(1946년), 그 후 3년 동안 헌법제정회의를 운영한 끝에 1949년 11월 말에 제정회의를 통과한다. 그리고 1950년 1월 26일 전 국민이 헌법을 채택하는 기념식을 통해서 헌법을 공포하였다. 이 날이 인도에서 가장 큰 국경일인 '공화국의 날'(Republic Day)이다. 그런데 이 날은 일찍이 1930년 식민지 치하에서 독립운동단체였던 국민회의 스스로가 선포했던 '완전독립의 날'(Purana Swaraji Day)을 기념한 날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헌법 공포일을 3월 1일로 잡아 국민의 헌법으로 승화시키는 절차를 잡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모든 것이 다른 나라와 같지는 않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중요한 점까지 간과해서는 사개가 어긋나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내후년은 제헌 70주년이고, 그 다음해인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다. 역사를 바로 잡아나갈 좋은 시점들이라 생각한다. 함께 생각해보자.

- 강경선 방송통신대 교수(헌법학)

현 민주주의 법학연구회 기초법분과 분과장이며 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이다. 대학에서 헌법, 기본권의 기초이론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최근 '영국과 미국의 노예제 폐지과정'에 대해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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