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덕혜옹주의 모습이 담긴 사진(좌)과 영화 '덕혜옹주'의 포스터(우) <사진제공=뉴시스>

[월요신문 허창수 기자] 영화 ‘덕혜옹주’가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영화 속에서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인물로 그려진 덕혜옹주의 모습이 실제 삶과 지나치게 괴리가 있다는 지적 때문이다. 본지는 관련 내용을 ‘팩트 체크’ 형식으로 알아봤다.

덕혜옹주는 실존인물인가.

▶ 덕혜옹주는 고종이 회갑을 맞던 해인 1912년 5월 25일 고종의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임금의 수라를 만드는 소주방 나인 출신으로 고종의 후궁이 되었던 복녕당 양귀인이다. 덕혜옹주는 1907년 강제 퇴위를 당한 후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고종에게 삶의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일례로 당시엔 아이를 낳은 지 스무하루째 되는 날인 삼칠일(三七日) 전에는 아이를 보면 안 된다는 관례가 있었지만 고종은 덕혜옹주가 태어난 지 2일째 되던 날 얼굴을 보러 갔을 정도로 끔찍이 사랑했다. <순종실록>에 따르면 덕혜옹주가 ‘덕혜’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받은 건 1921년 5월 4일이다. 이전에는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 고종에게는 9남 4녀의 자녀가 있었지만 순종,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만이 성년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한일합병 이후 조선왕실의 삶은.

▶ 조선왕실은 일본의 혜택을 누리며 일반 민중들과 괴리된 삶을 살았다. 실제로 경술국치 당시 일본과 맺은 한일합병조약 8개 조문 중 3개는 조선왕가의 복지와 편의에 관한 내용이다. 특히 한일합병조약 제3조는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누리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함을 약속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조선왕실이 국민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이유가 됐다.

<그래픽=월요신문>

일본 유학은 언제 갔나.

▶ 일본은 덕혜옹주의 이복 오빠인 영친왕에게 그랬듯이 덕혜옹주에게도 일본 유학을 강요했다. 황손들을 일본인화 하려는 일제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곤도 시로스케의 <이왕가비사>는 “메이지 천황의 황후는 ‘문명여성교육’을 명분으로 덕혜옹주의 일본 유학을 강요했고, 이를 거스르지 못한 순종은 1925년 3월 24일 덕혜옹주의 일본 동경 유학을 명했다”고 전한다. 이에 덕혜옹주는 3월 28일 14세의 나이로 ‘사실상의 강제 이주’라 할 수 있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3월 30일 덕혜옹주가 동경에 도착해서 간 곳은 영친왕과 그 부인 이방자가 거처하던 집이었다.

일본 옷 착용을 거부했나.

▶ 영화에서는 덕혜옹주가 기모노 입기를 거부한 것으로 그려졌지만 어린 시절의 덕혜옹주는 일본에 대한 반감이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덕혜옹주는 만 네 살 때부터 덕수궁에 설립한 유치원에서 일본인 교사에게서 배웠고, 일본인 가정교사가 있었으며, 소학교 2학년부터는 일본인 귀족 자제들이 다니는 일출소학교로 편입했다. 상궁 김명길이 쓴 <낙선재 주변>에는 “덕혜옹주는 '게다'를 신고 '하오리(일본 의상)'를 걸치고 통학하셨다. 집에 돌아오셔선 학교에서 배운 노래라며 '호타루 찬가' 등을 부르시곤 했는데 그 모습이 일본 아이들과 똑같아 섬뜩했던 기억이 난다”고 적혀있다. 이와 관련 고종시대 연구자인 장영숙 상명대 교수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독립적이거나 주체적 자각이 발달할 수 없었던 상태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덕혜옹주는 독립운동 등 일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활동을 했나.

▶ 영화에서 덕혜옹주는 일본의 군수공장에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 유학생 모임에 참석하며, 조선독립단체의 도움으로 오빠 영친왕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하는 등 일본에 저항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허구라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특히 영화에 등장하는 영친왕 망명 작전은 그의 이복형인 의친왕 이강의 망명 기도 사건을 각색한 것이다. 의친왕은 1919년 11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탈출하려고 압록강 건너 안동(지금의 단동)까지 갔다가 일본 경찰에게 잡혔다. 하지만 영친왕 이은은 중국 망명을 시도한 적이 없다. 영친왕은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된 직후 일본에 끌려가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은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육군 중장까지 지냈다.

덕혜옹주에 대한 조선인들의 감정은.

▶영화에서는 덕혜옹주가 조선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으로 그려졌지만 실제로는 망국의 책임이 있는 조선왕실이 일제로부터 막대한 세비를 받으며 호의호식하는 것에 대한 냉소와 반감이 높았다.

조현병(정신분열증) 증상이 있었나.

▶ 덕혜옹주는 조현병 증상이 있었다. 단, 영화에서는 망명 시도 실패 후 일본에 지내면서 정신병이 생긴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일본에서 유학하던 18세 때인 1930년에 ‘조발성 치매증’ 진단을 받았다. 1931년 일제에 의해 대마도 백작 소 다케유키와의 정략결혼 이후 병세가 더욱 악화되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덕혜옹주는 이후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머물렀다. 다케유키와는 1955년 이혼했다.

해방 후 한국 입국 거부당했나.

▶ 실제로 덕혜옹주가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해방 후 덕혜옹주는 한국으로 돌아오고자 했으나 조선 황실의 존재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승만 정부에 의해 입국이 거부됐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 다시 탄원서를 올린 끝에 1962년 1월 26일 3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요양했지만 병세는 크게 회복되지 않았다. 1967년 무렵부터 낙선재에서 말년을 보낸 덕혜옹주는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와 관련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는 “말을 잃고 정신 이상이 됐다는 건 현실을 부정하는 것 아니겠나.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지는 못했지만 일본에 적응할 수도 없는 소극적 저항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왜 영화는 덕혜옹주를 독립투사로 묘사했나.

▶ 원작자인 권비영 작가는 “영화적 재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가미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영화가 조금 확대되거나 과장됐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본다”면서 “역사서나 평전이라면 문제가 되겠지만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창작의 영역에선 작가나 감독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 인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권 작가는 이어 “덕혜옹주가 영화에서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서 저항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친일이라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오히려 일본인 학교에서의 생활기록이나 일기 등의 자료를 보면 친일을 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고종의 독살설을 의심’했다라던가 ‘학교에서 반항한다는 이유로 이지메’를 당한 기록은 있다. 게다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상당한 반감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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