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규 편집인

여성이 왜 냄비인가.

요즘은 버전이 달라졌지만 한때 유행했던 ‘냄비’라는 단어. 주변 사람들이 그런 표현을 쓸 때마다 나는 의아했다. 여성을 왜 냄비라고 부르는지. 냄비는 뭘 끓이거나 데우는데 쓰는 도구인데, 여자 역시 삶거나 데워야 하는 존재라는 뜻인가. 아니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라는 뜻인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제법 유명한 문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문인 왈 “멍청하긴, 복잡하게 생각할게 뭐가 있어, 말 그대로 그냥 냄비지. 부르기도 쉽고.”라고 면박을 주는 것이었다.

그 해석을 들은 며칠 뒤 사석에서 한 여기자에게 냄비라고 불러봤다. 그랬더니 질색하는 것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냄비가 남자에겐 스스럼없는 표현이지만 여자에겐 저항감이 큰 단어라는 사실을. 그 날 이후 나는 여자 앞에서 냄비라는 단어를 꺼낸 적이 없다.

요즘 신문 기사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단어가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이다. 너무 빈발해 이 나라가 성추행공화국인가 싶을 정도다. 가해 계층도 다양하다. 대학교수에 국회의원 법조인 교수 고위 공직자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런 현상은 여성의 노동계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사회가 양성 평등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일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확산되면서 지성의 상징인 저명한 문단 인사에게까지 불똥이 튀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 박범신이 그 대표적인 예다. 수십년 전 성희롱 발언이 여론의 도마에 오르자 박범신은 기억을 떠올리기 바빴을 것이다.

모든 작가들은 끊임없이 자정 과정을 거친다. 그게 지성인의 삶이고 자세다. 박범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과거의 성희롱에 대에 깊이 성찰하고 잘못된 일이었음을 사죄했다. 어떻게 보면 박범신의 성희롱 발언은 점잖은(?) 편에 속한다. 더 심한 발언을 예사로이 행한 문인도 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A 문인은 모 대학 강의실에 들어서며 “안녕 X지들”하고 인사를 건넸다. 귀가 번쩍 뜨인 남학생은 낄낄대며 웃었고 여학생들은 귀를 의심한 채 그를 쳐다봤다. 뭐라고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그의 태도가 너무 당당했다. 강의실 밖으로 끌고가 문제삼기엔 그의 평소 인품과 경력이 너무 빛났다. 유신정권 때 감방을 제 집 드나들 듯 했고, 작가로서 작품성도 뛰어났다.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 왜 그런 상스런 성적 발언을 일삼을까, 여학생들은 반신반의했다. 그래도 법적으로 문제 삼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성희롱 문제가 공론화되고 법적 소송으로 간 최초의 사건은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이다. 정확히 23년 전 서울대 우 모 조교가 담당 교수를 성희롱 혐의로 고발했다. 이 사건은 6년을 끌었다. 민사사건이 6년을 끌었다는 건 그만큼 진통이 심했다는 것인데 결국 우 조교에게 5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희롱도 명백한 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이 생겨났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남성의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지금보다 더 세차게 일어날 필요가 있다.

성추행은 그 자체로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더구나 심각한 성폭력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에게 발생하면 더 파괴적일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성희롱을 방지하기 위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할 시점이 됐다고 본다. 지난해 7월 월스트리트 투자컨설팅사 CEO 벤저민 웨이는 성희롱 소송에서 202억원의 배상금을 물어주라는 판결을 받았다. 배심원단이 결정한 전체 배상금 중 1600만달러는 징벌적 손해배상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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