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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신문 조원준 기자] 중국의 '사드 보복'에 우리 기업이 몸살을 앓고 있다.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중국 내 롯데 세무조사 혹은 소방·안전·위생 점검, 한류 한한령(限韓令), 무역규제 강화와 단체여행 금지 지침 등 강력한 압박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의 중국은 17세기 초 후금(後金)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미국을 전통적인 동맹관계의 명(明)나라로 가정한다면, 둘 사이에 낀 대한민국은 당시 광해군이 통치하던 조선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사드 배치로 야기된 2017년 한국의 상황이 400년 전 파병을 요청받고 고민하던 조선의 상황과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당시 광해군은 한 손으로 명나라에 부응하면서도 다른 한손으로는 후금의 손을 잡는 실리 외교를 펼쳐 국가적 재난을 막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광해군과 딴판으로 일관했다. 두 통치자의 외교술의 차이점을 비교해봤다.

17세기 초 광해군이 펼친 실리 외교

17세기 초 조선은 동맹인 명나라와 신흥강국 금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였다. 위기는 1618년 명(明)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명에 대한 조선의 태도는 인목대비의 교서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교서에는 “우리가 명나라를 섬겨 온 지 200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로는 군신 사이요, 은혜로는 부자 사이와 같다.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광해군은 일단 명의 요청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의정부 좌참찬 강홍립 장군을 도원수로 임명한 것. 강홍립은 광해군 11년 2월 부원수 김경서와 1만3천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넌다.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의미심장한 교지를 내린다. 광해군은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데에 힘쓰라”고 명했다. 도원수가 지휘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하되 군사의 보존을 최우선적 가치로 삼으라는 명령이었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명에 충실히 따랐다. 후금과 맞서 싸우는 척하며 적당한 시점에 투항했다. 그런 뒤 후금에 어쩔 수 없이 출병한 사정을 설명한 뒤 오해를 불식시켰다. 이로써 광해군은 명과 후금사이의 군사적 실리뿐만 아니라 외교적 실리까지 챙겼다.

박근혜와 광해군 외교전략의 차이점은 바로 이 대목이다. 광해군은 후금을 다독였으나 박근혜는 후금 즉 중국을 무시하는 전략을 폈다. 한반도에 사드 배치가 결정된 과정을 살펴보면 그 증거가 여실히 드러난다.

사드 추진 과정에서 외교력 부재

2014년 6월 3일 당시 한미연합사령관 커티스 스캐퍼로티는 한국국방연구원(KIDA) 국방포럼 조찬 강연에서 “사드, 한국 전개 요청했다”고 발언함으로써 최초 사드 논의에 불을 지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사드 도입 계획은 현재로선 없다”고 입장을 밝힌다. 변곡점은 2016년 1월 6일 발생한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을 강행한 것. 이에 박근혜 대통령은 “사드 배치 검토”를 표명했다. 중국의 반박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박 대통령과 외교안보라인은 중국을 설득하는데 공을 들이지 않았다. 구체적 사례가 2016년 2월 뮌헨 안보회의에서 한중 외교 수장의 만남이다.

당시 뮌헨 안보회의에서 왕이 외교부장은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만나 "주변국의 이해와 우려를 감안해 신중히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하다는 뜻을 전한다. 그러나 윤병세 장관은 왕이 부장을 설득하는 시도조차 없었다. 이에 화가 난 왕이부장은 다음 날 "항장무검 의재패공項莊舞劍 意在沛公이라고 반발한다. 사드 배치를 '유방(중국)을 겨누는 항우(미국)의 칼춤'에 비유한 것이다.

기회는 또 있었다. 2016년 2월 29일 우다웨이 6자회담 수석대표가 윤병세 장관을 예방했을 때였다. 당시 우다웨이 대표는 "중국은 한국의 사드 배치를 반대한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때도 설득보다 무시 전략으로 일관했다. 황교안 총리의 발언도 화를 키웠다. 지난해 6월 방중한 황교안 총리는 시진핑 주석을 만나 ‘사드는 아무것도 결정한 바 없다’고 말했다. 그 뒤 열흘이 채 안돼 사드 배치를 전격 발표했다. 중국은 분노했다. 시진핑의 입장에서는 황 총리의 발언이 자신을 우롱한 것과 다름없다고 여겼을 수 있다. 외교전문가들은 이때부터 중국 정부가 설득 카드를 버리고 보복에 무게를 실었다고 보고 있다.

인조의 친명배금정책이 던진 교훈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는 금나라를 배척하는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표방하고 몰락의 길을 걷는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발발한 뒤 청나라(후금) 군대는 한양까지 파죽지세로 침공했고, 놀란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대항해 싸웠지만 청의 공격을 당해낼 수 없게 되자 굴욕적 항복을 하고 말았다. 이후 인조는 항복의 예로써 ‘3배 9고두’를 해야만 했다. 이는 상복을 입고 3번 큰절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꽝꽝 박아 그 소리가 단 위에 앉아 있는 청 태종에게 들리게 하는 것으로, 3배 9고두를 마친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다 한다.

중국의 사드 보복은 현재진행형이다. 전통 우방국인 미국과의 관계도 유지하고 중국과도 사이 좋게 지낼 수는 없을까. 광해군의 실리외교가 던진 교훈은 4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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