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大韓民國5000年史 역대왕조실록, 뉴시스>

[월요신문 허창수 기자] 서양 속담에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역사의 내용을 개별 사건 단위로 쪼개서 보면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만 큰 줄기로 보면 일정한 주기와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원인이 같으면 결과도 같다’는 논리를 역사에 적용한데서 나온 말로, 일반적으로는 과거 역사가 보여준 인과를 다시금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적 의미로 사용된다.

지난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정사상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물러났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가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해 헌재로 넘긴 지 91일, 지난 2013년 2월 25일 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4년 13일(1476일) 만의 일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에서 촉발된 이번 대통령 탄핵사태는 조선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재위 1494∼1506)의 폐위를 떠올리게 한다. 500여년의 시간차를 두고 발생한 두 사건에서 △심리적 트라우마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농단 △공조직 무력화 △폐위(탄핵)을 대하는 태도 등의 공통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극복하지 못한 심리적 트라우마

연산군은 흔히 ‘폭군 중의 폭군’이라 불린다. 하지만 알고 보면 연산군은 조선시대 가장 완벽한 왕세자 코스를 밟은 왕이다. 조선 9대 왕인 성종의 적장자로 태어나 7세때 세자로 책봉됐고, 12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왕세자 교육을 받은 뒤 19세의 나이에 즉위했다. 소위 탄탄대로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런 연산군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어머니 폐비 윤씨였다.

성종의 첫 번째 후궁이었다가 연산군을 잉태하면서 왕비에 오른 윤씨는 한 때 성종의 총애를 독차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성종이 다른 후궁과 같이 있는 시간이 늘자 질투를 참지 못한 윤씨는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등 왕비로서의 품성을 잃는 행동을 많이 했다. 결국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의 눈 밖에 나 1479년 왕비 자리에서 쫓겨난데 이어 1483년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이 즉위 1년 후 윤씨 사망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됐다고 기록돼 있지만 이보다 실제로는 더 일찍 알았으리란 주장도 있다. 어머니에 대한 연산군의 애착이 컸던 만큼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를 위한 복수심은 즉위 이후 행해진 폭정의 동기로 작용했다. 폐비 윤씨가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1504년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는데 동의한 신하들을 모조리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를 내쫓는데 앞장섰던 할머니 인수대비를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했으며, 성종의 후궁인 정귀인, 엄귀인을 살해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무참하게 죽인 이같은 폭정에는 왕권강화 목적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이 중요한 동기로 작용했다.

연산군의 심리적 트라우마가 어머니 윤씨의 폐비 사건에서 비롯됐다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심리적 트라우마의 뿌리는 어머니 육영수 여사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잇따른 피살에서 찾을 수 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행사 도중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프랑스에 유학중이었던 박 전 대통령은 22세의 나이에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아 유신 정권에서 5년간 각종 행사를 주관하면서 국정에 참여했다. 하지만 1979년 10월 26일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마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피살됐다. 10·26 이후 신군부를 포함한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들은 하나 둘씩 박 전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박 전 대통령은 현실의 냉정함을 느끼며 그해 11월 두 동생과 함께 서울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박 전 대통령의 가슴속에 깊은 ‘배신의 트라우마’를 남겼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7년에 출간한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현실은 냉정했다. 대부분이 날 만나는 것조차 꺼려했다. 아버지가 매도당하고 주변 사람들조차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리던 때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비극의 씨앗이 된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와의 관계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80~90년대 은둔 시절 박 전 대통령 주변에 머물며 도와준 사람은 최순실씨 일가가 거의 유일했다.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 농단

부모의 죽음이라는 심리적 트라우마 때문이었을까. 연산군과 박 대통령에게는 모두 ‘장녹수’와 ‘최순실’이라는 ‘비선’이 존재했다.

‘일등급 기녀’를 의미하는 흥청(興淸) 출신으로 일약 후궁의 지위까지 오른 장녹수는 연산군 폭정의 핵심인물이었다. 연산군일기는 장녹수를 이렇게 표현했다.

“남모르는 교사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으므로, 왕이 혹하여 상사(賞賜)가 거만(鉅萬)이었다. 부고(府庫)의 재물을 기울여 모두 그 집으로 보냈고, 금은주옥(金銀珠玉)을 다 주어 그 마음을 기쁘게 해서, 노비ㆍ전답ㆍ가옥도 또한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장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을 주고 벌을 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다.”

왕의 총애를 등에 업은 장녹수는 연산군의 음탕한 삶과 비뚤어진 욕망을 부추기며 자신의 욕망을 채워나갔다. 남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는가하면, 각종 뇌물과 인사 청탁을 받았다. 궁 밖의 사가(私家)를 재건하기 위해 민가를 헐어버리게 하였으며, 모습이 고운 두 여인을 시기하여 두 사람의 부자 형제(父子兄弟)를 하루아침에 다 죽이기도 했다. 옥지화(玉池花)라는 기녀는 장녹수의 치마를 한 번 잘못 밟았다가 참형을 면치 못했다.

장녹수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자 출세를 위해 장녹수 앞에 줄을 서는 사람도 많아졌다. 이와 관련 연산군일기는 “무뢰(無賴)한 무리들이 장녹수에게 다투어 붙어 족친(族親)이라고 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녹수와 그 측근들의 횡포는 백성들의 원망을 높였고 결국 연산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최순실은 ‘한국의 라스푸틴’이라 불리던 고 최태민 목사의 딸이다. 최태민 목사는 1975년 ‘육영수 여사의 현몽(現夢)이 있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박 전 대통령을 만나는데 성공한 뒤 박 전 대통령을 이용해 치부를 했다. 실제로 최태민은 1976년 ‘새마음봉사단’을 만들어 박 대통령을 명예총재로 추대한 뒤 “영애께서 필요로 하는 일”이라며 기업들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돈을 뜯어냈다.

최순실과 박 전 대통령이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아버지 최태민으로부터 박 전 대통령을 소개받은 최순실은 청와대에서 박 전 대통령과 함께 자주 대화를 나누는가하면 새마음운동 등에서 함께 활동했다. 1979년 6월 10일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새마음봉사단 총재였던 박 전 대통령이 ‘제1회 새마음제전’에서 축사를 했고, 당시 새마음봉사단 대학생 총연합회 회장을 맡았던 최순실이 박 전 대통령을 수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전두환 신군부 등장 후 박 전 대통령은 육영재단 이사장 활동에 주력했다. 이때도 최순실은 부친과 함께 박 전 대통령을 도와 육영재단 운영에 개입했다.

한동안 잊혀졌던 최순실의 존재가 다시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 건 박근혜 대통령이 1998년 은둔을 끝내고 정계에 입문하면서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의원시절 비서실장이 최순실의 남편 정윤회였기 때문이다. 이후 오랜 시간 정윤회·최순실 부부는 박 전 대통령 곁을 지켰다. 이른바 ‘문고리 3인방’으로 불리며 각종 국정농단의 주역으로 활동한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도 이들이 발탁했다. 특히 최순실은 박 전 대통령의 의원 시절 공식 업무뿐만 아니라 미용, 의상, 장신구 등 개인 신상까지 도맡아 챙겼다. 부친 최태민에서 시작된 40년 동안의 인연 속에서 최순실은 박 전 대통령에게 가족보다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본격화된다. 최순실은 대통령의 연설문을 포함해 국무회의 모두발언, 대선 유세문, 당선 소감문 등을 사전에 받아보고 수정하는가 하면, 청와대‧장차관‧외교대사‧군‧법조계‧관세청‧민간기업에 이르는 광범위한 인사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삼성, 롯데 등 국내 굴지의 기업 53곳으로부터 총 774억원을 받아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설립하고 사익을 챙겼으며, 정부정책에 비판적인 문화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각종 불이익을 줬다.

‘왕권’ 견제할 공조직 무력화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연산군은 공통적으로 공조직을 무력화해 국가 시스템 붕괴를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왕에게 간언을 하며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던 정부기관은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였다. 사헌부는 시정·풍속·관원에 대한 감찰행정 및 관원의 자격을 심사하는 인사 행정을, 사간원은 국왕에 대한 간쟁과 논박을, 홍문관은 궁중의 서적과 문한을 관장했다. 이같은 삼사의 활동은 특히 성종 시대에 국왕과 대신, 삼사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며 수준 높은 유교정치를 구현하는 바탕이 됐다.

하지만 연산군은 부왕의 치세에 이뤄진 이런 체제를 대단히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강력하고 자유로운 왕권의 구축과 행사를 지상목표로 삼았던 연산군에게 삼사는 왕권 약화를 초래하는 걸림돌로 여겨졌다. 이에 연산군은 전제왕권 확립에 저해되는 모든 행동을 ‘윗사람을 능멸한다’는 의미의 ‘능상(凌上)’으로 규정하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통해 삼사의 기능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삼사의 기능 무력화는 연산군 자신의 고립과 몰락을 초래한 원인이 됐다. 삼사를 제압한 연산군은 왕권을 국정 개혁이나 경제 발전 같은 건설적인 분야에 사용하지 않고 연회, 음행, 사냥 등 자신의 기초적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집중했다. 이에 견제와 비판의 관계에 있던 대신과 삼사가 연합해 간쟁을 시작했고, 능상의 풍조가 삼사뿐 아니라 대신에게까지 만연한 결과로 해석한 연산군은 유례없이 가혹한 숙청을 단행했다. 이른바 갑자사화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초래한 궁극적인 결과는 과도한 재정지출에 따른 국가경제의 파탄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에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박 전 대통령 곁에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 등 올바른 정책 결정을 조언하는 인사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를 전혀 막지 못했다. 오히려 이들은 최순실의 수족이 되어 국정농단 사태를 주도했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도 마찬가지였다. 민정수석은 대통령 가족이나 고위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새로운 공직자 임명 시 그 사람의 도덕성 등을 검증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우 전 수석이 맡은 역할만 충실해 했더라도 최순실 국정농단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대통령 탄핵이라는 국가 위기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 전 수석은 국정농단 사건을 돕거나 방조한 혐의를 받고 있다.

폐위(탄핵)을 대하는 자기중심적 태도

국정 운영의 참담한 실패를 초래한 15세기 말~16세기 초의 연산군과 21세기 박근혜 전 대통령은 폐위(탄핵)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서로 닮았다.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연산군은 폐위되기 얼마 전까지도 “조선은 왕의 나라다. 조선의 백성 모두가 왕의 신하요, 조선 땅의 풀 한 포기까지도 모두 내 것이다. 조선의 모든 것이 본시 내 것인데 너희가 내 것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더냐”며 독재와 폭정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했다.

박 전 대통령 역시 그동안 제기된 대부분의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12일 저녁 청와대를 떠나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온 박 전 대통령은 민경욱 자유한국당 의원을 통해 “제게 주어졌던 대통령으로서의 소명을 끝까지 마무리 하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한다. 절 믿고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이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제가 안고 가겠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박 전 대통령의 발언은 사실상 헌법재판소 탄핵소추안 인용 결정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1월 25일에도 보수 1인 미디어 ‘정규재TV’와의 인터뷰에서 “오래전부터 누군가 기획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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