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피장막책가도' 확대 <사진=정민 교수 제공>

[월요신문 김혜선 기자] 19세기 병풍 그림 ‘표피장막책가도’에서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강진 유배 시절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 3수가 발견됐다. 이 시를 찾아낸 이는 정민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다. 정 교수는 계간지 ‘문헌과 해석’ 봄호에 표피장막책가도 속 시첩을 분석한 글을 발표했다.

‘호피장막도’라고도 불리는 이 그림은 8폭의 병풍으로, 6폭 병풍에는 표범 무늬가 그려져 있다. 하지만 여느 장막도와는 다르게 제 5폭과 6폭에는 살짝 걷힌 장막 안쪽으로 ‘책가도’가 등장한다. 책가도는 책을 비롯한 문방사우 등 사랑방의 여러 물품을 그린 것으로 조선후기 왕실에서 민간까지 크게 유행한 민화의 한 종류다. 정약용의 미공개 시 3편도 이 책가도 속에 ‘그려진’ 시첩에서 발견됐다.

<사진=정민 교수 제공>

21일 정민 교수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그림 속에서 시가 발견되는 것은 특별한 경우”라며 “미술사를 연구하시는 분이 호피장막도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시다가, 그림 안에 있는 시에 대해서 물어보셨다. 다산 연구자를 오랫동안 해와 한눈에 이 시가 다산의 것임을 알아봤다”고 말했다.

서첩에는 ‘산정에서 대작하며 진정국사의 시에 차운(次韻, 남의 운자를 써서 시를 지음)하다’(山亭對酌次韻眞靜國師)라는 제목의 시 한 수와 ‘산정에서 꽃을 보다가 또 진정국사의 시운에 차운하다’(山亭對花又次眞靜韻)라는 제목 아래에 딸린 시 두 수가 적혀 있다. 마지막 시는 5행 중 2행만 있다.

정 교수는 그림 속 시첩이 다산의 친필 시첩으로 판단한 근거로 ▲다산의 별호 ‘자하산인’, ‘다창’을 사용한 것 ▲매 편마다 다른 필체와 필명을 남긴 것 ▲다신이 ‘진정국사’의 글을 매우 좋아한 것 등을 꼽았다. 또한 <만덕사지> 등 다른 문헌에서 다산이 만덕사(백련사) 승려에게 진정국사의 시를 차운해서 시첩을 선물로 준 기록이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다음은 정민 교수와 일문일답.

 

그림을 보고 작은 시첩에 주목하는 것도 힘들지만, 시 속에서 다산 정약용을 떠올리기는 더 어려울 것 같다. 어떻게 병풍속 시첩에 주목하게 되었나.

실제로 그림을 보면 시첩이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시첩 안에 적힌 글자도 아주 작은데, 미술사학자이신 고연희 선생님께서 이 그림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던 중에 시첩에 적힌 ‘자하산인’과 ‘다창’의 정체가 궁금해져서 내게 문의했다. 나는 다산을 연구하는 사람이라 한눈에 (다산의 작품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림에 등장하는 시를 해석하는 것은 미술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고 선생님의 양해를 얻어 그림 속의 시문만 가지고 따로 글을 쓰게 됐다.

 

이전의 연구에서 이렇게 발견된 사례가 있나.

이렇게 시가 발견된 경우는 없다고 알고 있다. 특별한 경우다. 그림을 그린 화가가 다산의 시첩을 펼쳐놓고 다신의 친필을 거의 유사하게 옮겨 그렸다고 본다.

 

어떻게 한눈에 다산의 시라는 것을 알았는지 궁금하다.

다산의 필체는 독특하다. 다산을 많이 연구해와 한눈에 다산의 것으로 확신했다. 특히 3편의 시 중 초서체로 쓰인 마지막 시는 다산의 것 그대로다.

 

필체 외에 다산의 시라고 단정할 근거가 또 있나.

시 끝에 달린 서명인 ‘자하산인(紫霞山人)’과 ‘다창(茶傖)’에서 다산이 시의 저자임을 증명한다. 자하산은 다산초당이 있던 귤동 뒷산의 다른 이름이다. 다산은 자하산인이란 별호를 여러 번 사용했다. 또한 다산은 1년에 수백 근의 차를 만들어 마실 정도로 차를 좋아했는데, ‘다창’은 ‘차에 미친 사내’라는 뜻이다.

다산이 남긴 다른 시첩과 비슷한 면도 근거로 들 수 있다. 다산은 매 작품마다 다른 서체와 필명으로 솜씨를 뽐낸 시첩을 여럿 남겼는데, 그림 속에 등장하는 시첩도 그러하다. 1수는 반듯한 정자체인 해서, 2수는 약간 흘려 쓴 행서, 3수는 흘림체인 초서로 각기 다르다. 다산의 <백운첩>은 탁옹(籜翁), 송보(頌甫), 다산초자(茶山樵者) 등 매편 시마다 다른 필명을 적었다. 그림 속 ‘자하산인(紫霞山人)’, ‘다창(茶傖)’ 등 다른 필명을 적은 것과 동일하다.

세 편의 시는 ‘진정국사’인 고려시대 만덕산 백련사(白蓮社)의 승려 천책의 시를 차운했는데, 다산은 “신라와 고려를 통틀어 세 사람을 꼽는다면 최치원과 이규보와 천책을 꼽아야 한다”며 천책을 아주 좋아했다. 다산은 천책의 문집인 <호산록>을 즐겨 읽었고, 그림 속에 나오는 시 역시 호산록에 실린 운자를 차용했다.

또한, 첫 번째 시 7구를 보면 화자는 남방(南方)에서 길게 머문 적이 없는 사람인데, 다산 역시 집과 떨어져서 남방에서 한동안 머물렀었다. 또 다산은 매년 봄 용혈암이 있던 대구면 항동(項洞) 인근 윤서유(尹書有)의 별장에 놀러가 술과 생선회를 안주로 즐겁게 놀곤 했는데 그림 속 첫 번째 시 역시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이번에 새로 발견된 시가 기존 다산의 작품과 비교해 어떤가. 문학적 가치가 있는 작품인가.

책자 속에는 중간에 빠진 글자도 있고, 시 내용 자체가 풍경을 읊은 것이어서 특별히 문학적으로 유의미한 것은 아니다. 문학적 가치를 따로하고 의미를 찾는다면, 고려 때 천책국사에 대한 다산의 경모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을 추가할 수 있겠다.

 

세 편의 시가 가지는 의의는.

다산의 새로운 별호인 ‘다창’을 발견한 것과 다산의 친필 시첩이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을 들 수 있겠다. 다른 문헌에서 다산은 1814년 봄에 만덕사(백련사)의 승려였던 아암 혜장의 제자 2명을 데리고 용혈암 답사를 다녀오고 정오(丁午)의 시에 차운해 시첩을 선물로 줬다는 기록이 있다. 다산이 이때 두 승려를 위해 친필로 써준 서첩이 이 표피장막 책가도 속의 그것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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