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아이 돌봄은 통일의 희망 살리는 길”

[월요신문 권현경 기자]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에 있는 탈북아동 그룹홈 ‘우리집’은 마석훈 센터장과 5명의 사회복지사, 탈북 아동 11명과 함께 생활하는 곳이다.

기자가 우리집에 도착한 시각은 3일 오후 5시. 머릿속으로 갖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성인 탈북자도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데 탈북 아동은 오죽하랴. 그런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은 어떤 심성의 소유자일까.

그런 생각도 잠깐, 우리집 문을 열고 들어서니 요란한 아이들 웃음소리가 귓전에 울려 퍼졌다. 소리를 따라 조용히 계단을 올랐다. “거기 서”, “잡는다”, “깔깔깔” 소리의 끝은 건물 옥상에 닿아 있었다. 술래잡기를 하던 아이들은 기자와 눈이 마주치자, 해맑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넨다.

마석훈 센터장을 찾으니 옥상에 있다고 한다. 바로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 한 구석에 초딩 남자애 2명과 어른 한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개 집 울타리를 손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빠와 아들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어른은 우리집의 주인이자 탈북아동 지킴이 마석훈(47) 대표다.

다시 4층으로 내려와 아이들이 있는 거실에 들어섰다. 거실은 빽빽하게 책이 꼽힌 책장이 벽을 둘러싸고 가운데 긴 탁자가 놓여 있다. 실내 분위기는 자유로우면서도 분주했다. 책을 읽고 있는 아이, 학원 시간에 맞춰 서둘러 식사하는 아이, 막 집으로 들어서는 아이, 태권도복을 갈아입는 아이 등등. 그런 아이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마석훈 대표. 한마디로 궁합이 잘 맞는 느낌이다. 그에게 가장 먼저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우리집’은 너무 흔한 표현인데 누가 그렇게 지었나.

아이들과 함께 이름을 고민하던 중 한 아이가 “그냥 우리집인데 무슨 이름이 필요하냐”고 해서 ‘우리집’으로 짓게 됐다.

우리집에 총 몇 명이 생활하나. 탈북 아동 외에 결손 가정 아이들도 있나.

탈북아이들만 오는 그룹홈이다. 여기 모인 아이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북한에서 부모와 함께 남한으로 오다가 부모는 북송되고 아이 혼자만 오게 된 경우. 같이 한국에 왔지만 부모가 이혼하거나 생활이 어려워 같이 살지 못해 혼자가 된 아이도 있다. 이런 경우엔 남한의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고아원으로 가게 되면 낯선 한국 생활과 또 다시 버림받았다는 이중의 혼란과 고난을 겪게 된다. 우리집에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대학생까지 11명이 같이 살고 있다. 사회복지사 6명이 2명 씩 돌아가면서 상주하는 방식으로 출퇴근한다. 아이들의 식사에서부터 학습 지도 생활 전반적인 것까지 살뜰히 챙기고 있다.

탈북 아동 보호 시설을 맡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2001년 경기도 안성 하나원에서 북한이탈아동을 1년 정도 가르친 게 인연이 됐다. 당시 혼자인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려니 너무 마음이 아파서 같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교육보다 함께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대학생 때 학생운동을 하면서 통일에 대해 고민을 했던 것을 작은 것이라도 한 번 실천해보자는 마음도 있었다. 이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작게나마 통일의 희망을 살리는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북한 아이들에겐 북한이 고향이고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을 가지고 성장하도록 도우면 훗날 통일이 됐을 때 시금석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열 명 넘는 아이들을 돌보는데 어려움이 많을 것 같다. 어떤 점이 힘드나.

가장 힘든 점은 부모 역할은 하지만 진짜 부모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좀 더 밀착된 사랑을 주고 싶은데 여러 명이다 보니 쉽지 않다. 그래서 얘들의 기대치를 채워주지 못하는 것 같아 늘 안타깝다. 인원이 많다 보니 옷이나 신발을 사줄 때도 신경이 많이 쓰인다. 얘들이 선호하는 브랜드를 사 주고 싶지만 브랜드에 따라 워낙 가격차가 크다. 공평하게 해주려고 하지만 원하는 디자인이 다르고 사이즈도 달라서 사주는 상품 가격에 차이가 있다. 그럴 때 아이들이 불만을 가지지 않을지 한 번 더 고민하게 된다.

여럿이 살다보니 규칙도 필요할 것 같은데.

규칙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아이들 마음을 고려해 시행한다. 아이의 부모가 예고 없이 찾아오면 부모가 없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아 가능하면 밖에서 만날 것을 권한다. 마지막 주말에는 외박이 가능하다. 부모가 없는 얘들은 멘토를 연결해서 그 집을 방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각별히 우리집 아이들에게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집 가훈이 있다. “가지게 되더라도 남에게 거만하지 않게 베풀고, 도움 받아 살더라도 비굴하지 않게 받으며, 누구 하나 소외됨 없도록 늘 깨어 있으며, 가난한 이웃을 섬기기 위해 내 삶을 나누고, 한반도의 평화 공존을 위해 노력한다”가 바로 그것이다. 이곳에 생활하는 아이들이 도움 받는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작은 것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변에 생활이 어려운 아이들을 놀러오게 해서 책을 같이 읽게 하고 후원 받은 학용품이 많을 땐 나누어 쓴다. 가난하지만 떳떳하고 당당하게 자라도록 보살피고 있다.

비영리 민간단체인데 운영비는 어디서 충당하나.

우리집은 개인시설이다. 특정 종교단체나 복지단체 소속이 아니다 보니 일반 시민의 자발적 후원으로 운영된다. 2002년 서울 강북 수유동에 처음 문을 연 뒤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녔다. 그러다 다소 집값이 저렴한 안산에 정착하게 됐다. 2007년 사회복지기관으로 정식 등록되면서 사회복지사 급여는 시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현재 월세로 2층과 4층을 임대해 생활하고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 프로젝트를 수행해 받는 지원금과 후원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2002년이면 15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이곳을 거쳐 간 탈북아동은 얼마나 되나. 또 그들과 지속적으로 연락이 닿나.

70여명의 아이들이 성장해서 독립했다. 간혹 연락이 오는 경우는 돈을 빌려 달라, 보증을 좀 서 달라는 때다. 연고가 없고 부탁할 곳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 다 들어 주기 어려운 현실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원장님’ 하고 달려와서 안기고 하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이곳에서 그나마 풍요로웠던 기억이 있으니 사회로 나가면 방치되는 느낌을 받아서 오히려 서운해 하는 것 같다.

보람도 있을 것 같다. 잊혀 지지 않은 기억은.

옥상에 키우던 개가 새끼를 두 마리 낳았다. 한 마리는 귀엽고 토실토실하고, 한 마리는 비실비실 기운도 없고 못생겼다.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입양 보내기로 하고 어느 개를 보낼지 아이들이 모여 투표를 했다. 투표 결과 못 생긴 강아지로 결정했다. 그 얘기 듣고 감동했다. 전자는 어딜 가든 사랑받을 것이지만 못 생긴 개는 우리밖에 사랑해주지 못할 것 같아 그렇게 결정했다더라. 그런 걸 보면 아이들은 공감 능력이 발달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집 애들은 힘든 이웃을 만나면 동병상련을 느끼는지 잘 어울린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나 세월호 유가족 분들과도 만났는데 아이들이 허물없이 잘 어울렸다. 소외계층과 공감하고, 밝고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다. 가슴이 뭉클했던 적이 또 있다. 여기서 자란 여자 아이가 성년이 돼 결혼식을 하게 됐다. 아버지가 없어 내가 신부의 손을 잡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독립을 시켰을 때, 내가 이 아이들이랑 같이 살기 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고, 나도 해 본적 없는 결혼을 딸애 같은 우리집 아이가 했다는 생각도 들어 가슴이 찡했다.

시설을 늘려 아이들을 더 많이 보살필 계획은 없나.

집을 짓거나 일부러 시설을 늘릴 계획은 없다. 시설 규모가 커지면 여러 가지로 유혹이 생길 것 같다. 주변을 봐도 처음엔 선한 의지로 시작했다가 타락하고 결과가 좋지 않는 경우를 꽤 봤다. 대형 시설보다는 아이들과 함께 동물을 키우면서 농사도 짓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

 

8시가 되자 아이들이 공부를 하러 거실 탁자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다가갔다. 질문을 하려고 하자 아이들이 서로 손을 들며 먼저 하겠다고 나섰다. 초등학교 6학년 지영이에게 ‘언제 이곳에 왔냐’고 묻자 “2년 전에 우리집으로 왔다”고 대답했다. ‘우리집에서 생활이 어떠냐’고 묻자, 마 대표를 ‘마쌤’이라고 칭하며 “마쌤과 동생, 언니, 오빠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가 제일 좋았어요. 놀이동산 갔던 것도 좋았고 다 재밌고 좋아요. 한 번도 놀러가 본 적이 없었거든요”라고 대답했다. 스무 개의 반짝이는 눈망울 속에 우리집 쥔장의 깊은 사랑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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