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책, 손끝에서 탄생하다”

[월요신문 김미화 기자] 한 드라마 주인공이 명품 트레이닝복을 입고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옷”이라는 대사를 했었다. 이 옷을 책으로 바꿔 생각해보자. 대부분은 ‘책을 한 땀 한 땀 만든다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것이다. 산업화 된 요즘 시대에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책을 만드는 장면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 일련의 제본 과정을 수작업으로 이어나가고 있는 곳이 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책을 만드는 예술제본 공방 ‘렉또 베르쏘’(RECTO VERSO)가 그곳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제본 장정가 백순덕씨가 1999년 설립했다. 현재는 그의 제자 조효은씨(38)가 뜻을 이어 받아 운영하고 있다.

3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위치한 렉또 베르쏘를 방문했다. 렉또 베르쏘에 들어서자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제본 도구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종이를 꿰매는 수틀, 종이를 누르는 프레스와 같은 것들이 이곳의 아날로그적인 성격을 말해주고 있었다.

렉또 베르쏘는 라틴어로 ‘책의 앞장과 뒷장’을 뜻한다. 조씨는 “책을 펼쳤을 때 보이는 종이 한 장 한 장에 앞장과 뒷장이 존재한다. 즉, 책 한권이 수많은 렉또 베르쏘로 이뤄져 있는 것”이라며 공방 이름의 의미를 소개했다.

조씨에게 예술제본의 정확한 뜻을 물었다. “예술제본은 상업적인 제본과 구분하기 위해 부르는 명칭”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조씨는 “손으로 제본하는 방식이 예술제본이다. 책을 만드는 작업에 국한되는 건 아니다. 낱장의 기록물을 엮는 작업, 낡은 책을 복원하는 작업, 책의 생명을 늘려주는 작업. 그런 것들을 통틀어 예술제본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제본을 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예술제본은 북아트(Book Art)라는 장르와 헷갈릴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예술제본과 북아트를 바라보는 시각은 엄연히 다르다. 북아트는 ‘아트’에 방점이 찍혀있는 반면 예술제본의 목적은 ‘책’이다. 자기표현의 방식으로 책이라는 형태를 택해 결과물을 내는 게 북아트라면, 예술제본은 책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기법들을 담는 작업이라는 설명이다.

예술제본을 접하는 순간 평생의 직업이 될 거로 확신했다는 조씨. 그녀는 예술제본의 매력에 대해 “모든 과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해 책을 만드는 것은 예술제본 뿐이다. 책의 내용부터 시작해 책에 물성과 구조, 형태와 디자인까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다”고 말했다.

“예술제본은 과정을 즐기는 일”

예술제본의 과정은 세세하게 들어갈 경우, 60~100가지 정도의 공정을 거친다. 전체적으로 보면 책을 일일이 낱장으로 분해하는 일이 먼저다. 이때 종이가 훼손됐다면 보수 작업이 이뤄진다. 그 다음 프레스라는 도구로 종이 사이의 공기를 빼주고, 톱질로 구멍을 뚫고, 실로 꿰맨다. 필요하면 책등을 둥글리는 망치질을 해주고, 해드밴드를 실로 묶어주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책의 몸체작업이 끝나면 책 표지를 씌운다. 책표지는 보통 종이나 천, 가죽 중에서 선택한다. 그것으로 작업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장식 작업을 거쳐야 한다. 마지막에는 엔드페이퍼라고 불리는 종이를 붙인 후 일주일 정도 책을 눌러놓아야 완성된다. 어느 하나 정성이 없어서는 이뤄지지 않을 작업 과정인 셈이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기간은 평균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다. 책 상태에 따라서 기간은 더 늘어날 수 있다. 때문에 조씨는 예술제본에 필요한 자세가 ‘끈기’라고 말한다. 조씨는 “예술제본은 과정을 좋아해야 계속 할 수 있다. 과정 자체를 즐기면 결과도 잘 나온다. 결과물만을 바라보고 빨리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작업 자체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질이 낮다”고 말했다.

이곳은 어떤 고객이 찾을까. ‘나만의 특별한 책’을 만들고자 하는 개인 고객이 많다고 한다. 조씨는 “개인적으로 작업을 의뢰하는 분들의 수요가 많다. 소중하게 간직하던 책을 제본해 오랫동안 소장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책이 손상돼 물리적인 복원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작품집을 남기고 싶어 오기도 한다. 웨딩사진이나 가족사진을 책으로 만들고 싶어 오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16년 동안 기억에 남는 제본작업도 꽤 있다. 조씨가 어릴 때 봤던 애니메이션 초판 원고를 의뢰받기도 하고, 비공개 된 연예인의 웨딩 사진을 책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업에 대해 물었다. 조씨는 망설임 없이 괴테 파우스트 초판본이라고 말했다.

조씨는 “두 권으로 나뉘어 있던 ‘파우스트’ 초판을 분해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었다. 의로인은 노인이었다. 그 책 자체가 귀하고 비싼 책이라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다. 소장인께서 그 책을 대하는 태도, 그 책을 나에게 맡기셨을 때의 마음가짐이 인상적이었다”고 회상햇다. 조씨는 “책을 분해하게 되면 소장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고 얘기 드렸었다. 그때 그 분이 경제적인 가치로 되팔 책이 아니라고 말씀해주셨던 게 아직도 생각난다. 작업할 때 사소한 부분까지 의견을 주셔서 작업 내내 행복했다”고 말했다.

제본가 양성 수업도 이뤄져

렉또 베르쏘는 예술제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강좌도 연다. 강좌는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으로 구분된다. 초급 과정은 8주 코스. 본격적으로 고전 제본에 대해 배우는 중급과정은 2년이 걸린다. 고급 과정은 정해진 기한이 없다.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이어진다.

초반에는 출판업계 종사자가 많이 배우러 왔다. 최근에는 자신만의 책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로 수강생이 바뀌었다. 조씨는 “예술제본은 상업화가 되기 힘든 성격의 작업이다. 오시는 분들은 책을 좋아하고, 책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겨 배우러 오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렉또 베르쏘를 거쳐 간 사람들도 많다. 초급과정은 15년째이고 현재 87기 수업이 이뤄지고 있다. 조씨는 “주위를 보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늘 있다. 나는 책이라는 매체가 다른 매체에서 줄 수 없는 감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은 아니지만 이런 작업을 공감해주시는 분들이 있기에 같이 해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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