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을 넓게 펼친 채로 피어나, 다소곳이 피어나는 중국산 백목련에 비해 우아미가 비교적 적은 편인 우리 토종 목련의 꽃. <사진=고규홍>

“꽃잎 하나의 무게가 세상의 표면을 변화시켰고, 세상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인류학자이며, 20세기 최고의 자연주의 에세이스트인 로렌 아이슬리 Loren Eiseley (1907 ~ 1977)는 그의 대표적 명저 《광대한 여행 The Immense Journey》에서 꽃의 출현을 시적인 언어로 표현했다. 꽃이 나타나면서부터 온통 초록빛이던 지구에 다양한 빛깔이 나타났으며, 꽃들이 어마어마하게 지어내는 씨앗과 열매는 마침내 사람이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양식, 에너지가 됐다고 했다. 꽃이 피는 식물, 즉 현화식물 顯花植物이 나타난 건 1억5천만 년 전쯤의 일이다.

바야흐로 꽃의 계절이다. 이 즈음에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아무래도 목련 종류다. 세계적으로 900 여 종류가 있는 목련은 지구상에 가장 먼저 나타난 현화식물 가운데 하나다. 목련은 현재 1억 4천만 년 전의 화석에서 흔적이 발견된다. 목련 종류의 식물을 ‘살아있는 화석 식물’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오래된 꽃이지만, 목련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은 변치 않았다. 여전히 목련은 세계인의 사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현화식물이다. 대개는 백목련과 자목련을 이야기하지만, 목련 종류 가운데에는 노란 색 꽃을 피우는 종류가 있으며, 꽃 한 송이에 꽃잎이 열두 장에서 마흔 장까지 돋아나는 별목련 종류도 있다. 뿐만 아니라, 한여름에 꽃 피우는 종류까지 있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는 백목련과 자목련은 중국에서 들어와 자리잡은 나무다. 물론 오래 전에 들어온 나무여서, 굳이 외래식물이라 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자생지는 우리나라 안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우리 토종 목련 가운데에 가장 큰 나무인 진도 석교초둥학교 목련. <사진=고규홍>


이 모두를 ‘목련’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목련과의 나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식물 가운데에는 별다른 수식 없이 온전히 ‘목련’이라고만 불러야 하는 식물이 하나 있다. Magnolia kobus DC. 라는 학명을 가진 토종 식물이다. 다른 목련 종류와 구분하기 위해 ‘고부시 목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 토종 목련 가운데에 가장 큰 나무인 진도 석교초둥학교 목련. <사진=고규홍>

 

‘고부시’는 ‘주먹’이라는 뜻의 일본어 こぶし(拳)에서 온 말로, 목련의 꽃봉오리가 작은 주먹처럼 생겼다 해서 식물학계에 처음 등록할 때 붙인 학명이다. 우리나라의 식물학 체계를 자리잡기 전인 일제 강점기 때의 일로, 당시 우리나라의 모든 식물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일본의 식물분류학자 다케노신 나카이 中井 猛之進 Takenosin Nakai, 1882 ~ 1952 가 붙였다. 우리의 토종 식물을 일본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 일이다. 게다가 한번 식물학계에 등록한 식물은 다시는 바꿀 수 없다는 데에서 더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더 안타까운 일이 있다. 우리의 목련은 사실 조형미가 중국의 백목련이나 자목련에 비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아홉 장의 꽃잎이 다소곳이 오므린 채 우아하게 피어나는 백목련의 꽃과 달리, 여섯 장의 꽃잎으로 피어나는 우리 목련의 꽃은 평평하게 펼친 채로 피어나는데, 백목련에 비해 조형미가 떨어진다. 눈앞의 아름다움에만 정신을 팔린 우리는 토종 목련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결국 전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우리 토종 목련은 이제 우리나라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희귀 식물이 되고 말았다.

꽃잎을 넓게 펼친 채로 피어나, 다소곳이 피어나는 중국산 백목련에 비해 우아미가 비교적 적은 편인 우리 토종 목련의 꽃. <사진=고규홍>

 

꽃잎을 넓게 펼친 채로 피어나, 다소곳이 피어나는 중국산 백목련에 비해 우아미가 비교적 적은 편인 우리 토종 목련의 꽃. <사진=고규홍>

 

더 아름다운 것을 찾고, 더 아름다운 것을 오래도록 곁에 두고자 하는 건 사람의 본성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에만 경도한 나머지, 나를 낳고 길러준 우리 땅의 식물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나무가 우리에게 의미있는 건 결코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토양을 일구고, 우리가 숨쉴 수 있는 산소를 지어내면서 우리가 살 수 있는 생명의 터전을 일궈준다는 점에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로 우리가 나무와 더불어 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출발점이다.

토종 나무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를 낳고 길러준 우리 땅 우리 것을 잃어가는 일과 다름없다. 덜 아름답다 해서 관심을 줄이고, 하나하나 우리 곁에서 떠나보내는 건 언젠가 우리 삶의 토대를 송두리째 잃고, 뿌리 없이 부유하는 허망한 삶으로 둘어서는 지름길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땅 어디에선가 그러나 우리의 눈길 바깥에서 이 땅의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 홀로 신음하며 살아가는 우리 ‘목련’을 더 살갑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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