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라도 밥을 굶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힘에 겨운 일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배는 쉴 새 없이 꼬르륵거리지, 머리는 어지럽지, 다리는 휘청거리지, 삶을 지탱하고자 하는 의욕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가족은 돈이 없어 끼니를 걸러야 했던 적은 없다. 다만 자의로 세 끼를 금식해본 적이 있는데, 바로 중학교 때였다. 4월의 어느 주일, 우리는 엄숙히 다짐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로 적어도 하루 동안 금식하기로. 그리고 전도사님이 나눠준 서약서에 이름을 적었다. 나름 커다란 결단이었다.

그리고 찾아온 운명의 성 금요일. 아침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점심까지도 참을 만 했다. 저녁이 되자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왔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이불 속에 누워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자정이 넘자마자 방에서 기어 나와 음식을 섭취했다. 밥을 한 숟갈 꼭꼭 씹어 넘길 때의 그 느낌이란! 이제 와 돌아보면 정말 경건함과는 거리가 먼 성 금요일이었던 셈이다.

하루만 금식을 해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매일같이 굶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떨까? 단순히 배를 곯는 정도가 아니라 먹지 못해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세계의 절반에 이른다면? 이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프리카에 사막이 많아서? 그곳 사람들이 부지런하지 않아서? 그렇다면 해결 방안은 무엇일까? 쏟아지는 물음을 안고 책장을 펼쳤다.

남수단 우다바에서 한 어린이가 한 쪽 발목에 기아 관련 왜래치료를 받았다는 의미인 '흰색 발찌'를 차고 있다. 수단, 소말리아 등 아프리카 일부 국가에서 가뭄과 기아로 70여년내 최악의 인도적 위기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사진=뉴시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의 저자 장 지글러는 말한다. 문제의 핵심은 사회 구조에 있다고.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 그것이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기에 매년 수백만의 인구가 굶어죽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공평한 분배를 가로막고 있는 원인은 무엇일까? 불안정한 정치체제, 국제기구의 자금난, 선진국의 엄청난 고기 소비량, 다국적기업의 이권 탈취 등 여러 원인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한 가지는 바로 ‘가진 자의 탐욕’이다.

탐욕의 역사는 수 세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 각국이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삼으며 강제한 것은 바로 단일작물 경작이었다. 식민지 차드에서는 프랑스에서 사용될 면화를, 가나에서는 영국을 위한 카카오를, 브룬디와 르완다에서는 차 농사를 지어야 했다. 원주민들이 주식인 쌀을 재배할 수 없게 되면서 자급자족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선진국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식량을 수입해야 먹고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다국적기업들은 이런 상황을 악용하는 대표주자다. 칠레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경우를 보자. 그는 당선되자마자 외국의 의존에서 벗어나 칠레의 자립성을 높이는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대기업의 국유화, 농지개혁, 분유 무상배급 등 국민들에게 열렬히 환영받는 정책들이었지만,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당선 3년 만에 쿠데타로 암살된 것이다. 그 배후에는 헨리 키신저와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있었다. 결국 칠레에서는 수만 명의 아이들이 다시 영양실조와 배고픔에 시달리게 되었다. 부르키나파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어디서 해결책을 찾아야 할까? 저자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지글러는 이야기한다. 북한 정권은 국민들의 기아를 해결하기 위해 거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고. 군의 무장과 핵개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사이 인민들은 죽어가고 있다고. 그럼에도 상류층은 호화로운 삶을 즐기고 있다고. 때로는 식량원조가 이런 세력들의 배를 불려주기도 한다고. 지글러의 말에 아들 카림은 묻는다. “원조를 계속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지글러는 답한다. “아빠는 구호단체의 방침에 동의해. 구호단체는 극단적인 조건에서도 활동하고, 갖가지 모순들과 싸워야 해. 그러나 어떤 대가도 한 아이의 생명에 비할 수는 없단다.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그 모든 손해를 보상받게 되는 거지.”

우리가 아등바등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갈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문턱을 넘나드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반도에서 조금만 더 시선을 넓힌다면 얼마나 많은 이웃들이 존재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존재에 무감각하다. 하루에 10만 명이 죽어 가는데,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 소식을 흘려듣고야 마는 것이다. 이제 그저 한국인이 아닌, 세계인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해나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의 이웃들이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도록 발 벗고 나서야 하지 않을까. 하나의 생명, 그 소중함에 대한 인식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가길 기대해본다.

임하영

1998년 끝자락에 태어났다. 지금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는 대신 홈스쿨링으로 공부했다.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펼져질지 잘 알지 못하지만,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에 관심이 많다. 최근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을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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