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죽음의 바다에서 아우슈비츠를 목격하다

이 시대의 지옥, 지중해

2017년하고도 5월입니다. 첨단의 시대죠. 하늘에 드론이 날아다니고, 자율주행 자동차가 개발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 지도자가 나타났습니다. 코스피 지수는 2천300을 넘었다죠. 시대는 진보하고, 더 나은 세상,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 시각, 저는 지중해에 있습니다. 지중해라는 말에는 묘한 설렘이 있습니다. 따뜻한 남국의 나라, 평화롭게 쉬어가는 휴양도시라 생각하죠. 아닙니다.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먼 바다에서 난민들이 소리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의 지옥 아우슈비츠였다면, 오늘날 이 시대의 지옥은 여기 지중해입니다. 지금부터 지중해에서 난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희 시와치 구조선에 300여명을 태웠습니다. 사람 무게만 20톤이 넘습니다. <사진제공=시와치>

지중해 난민구조 현장입니다. 시와치(Sea-Watch)라는 독일 민간난민 구조단체의 선박입니다. 길이 32미터, 폭 7미터. 아주 작은 배입니다. 선원은 16명. 선장부터 기관사, 요리사, 보트운전수, 의사, 간호사, 통역사 등 각자 임무가 있습니다.

저는 이 배의 일등항해사입니다. 배의 실무자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선장은 책임자입니다. 학교에서 교장이 수업을 하지 않듯, 선장이 배를 몰지는 않습니다. 배의 살림은 모두 제가 맡습니다. 어깨가 무겁습니다.

시와치는 올해 바닷물이 따뜻해지는 3~11월 지중해에서 난민을 수색 구조합니다. 난민 구조팀은 매일 침몰 직전의 배를 마주합니다. 때로는 이미 침몰해 시신으로 가득할 때도 있지요. 그래서 보름씩 팀을 짜 교대합니다.

저는 4월 17일~29일 지중해에서 난민을 수색구조합니다. 6월 상반기에도 한 차례 선장으로 봉사합니다.

배는 리비아 북쪽 해안 가까이에서 난민을 수색합니다. 영해기선을 넘지 않고 공해상에 머무릅니다. 난민을 발견하면 일단 저희 작은 배에 구조합니다. 그리곤 이탈리아 로마의 수색구조본부에 연락합니다. 그러면 이탈리아 해군은 그제야 나타나지요. 그러면 난민들을 해군에 인계해 안전하게 뭍으로 갈 수 있게 합니다.

저희 시와치와 국경없는 의사회, 세이브 더 칠드런, MOAS, 아이유벤타(Iuventa), 민덴(Minden), 시아이(Sea eye) 등 여러 민간 단체의 배가 주변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역을 나눠 수색합니다.

출항을 앞둔 시와치 2017년 제4차 수색구조팀. 아랫줄 가운데가 필자. <사진제공=시와치>

출항

지난 4월 12일 섬나라 몰타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낯선 동료들과 이틀간 손발을 맞췄습니다. 익수자 구조와 환자 응급조치, 구조보트 진수와 난민 이송, 보안 검색 등 바다에서 겪을 일을 미리 연습했습니다. 구조대원들은 예행연습에도 사뭇 진지합니다. 독일사람 특유의 진지함이라 생각했는데, 실은 닥쳐올 실전이 걱정스러운 모양입니다.

제가 도착한 지 사흘째에 구조선이 귀항했습니다. 날씨가 궂어 튀니지 항구에서 며칠을 허비하고도 난민 1천400여명을 구조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선원들에게서는 짠 바다냄새와 함께 짐작할 수 없는 어떤 여운이 풍겼습니다. “구조가 어땠느냐” 물으니 “정신없었다”는 말로 얼버무립니다. 그건 고단함과 안도, 미처 정리하지 못한 감정이 얽인 탓일 텝니다. 저는 그리 짐작 할 뿐입니다.

서둘러 일을 주고받았습니다. 음식과 연료를 채운 우리는 뱃고동을 크게 한번 울리고 리비아 연안으로 떠났습니다.

 

1~4일째, 빈바다

힘차게 몰타 항을 떠난 시와치 호는 리비아 영해기선 바깥에서 난민들의 길목을 지킵니다. 날씨가 궂습니다. 선원들은 멀미에 고꾸라졌습니다. 다들 한데 모이는 식사시간에도 빈자리가 보입니다.

내내 고문입니다. 바다가 거칠면 난민들이 해안을 떠나지 못합니다. 구조할 일이 없어 다행이지만 선원들은 멀미에 괴롭습니다. 바다가 잔잔하면 난민들이 들이닥칩니다. 아수라장일 테지요. 이런들 저런들 등 따스하고 배부른 시간은 없습니다.

배가 휘영청 흔들리는 바람에 슬로바키아에서 온 의사 ‘라도’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 오물을 뒤집어썼고, 요리사 ‘피트’는 접시와 유리컵을 깨뜨렸습니다.

벌써 나흘째 멀미 고문만 당하고 있습니다. 원대한 기상을 품고 떠난 돈키호테가 고작 자갈밭에 비틀댑니다. 출항의 흥분은 사라지고, 지루한 항해와 괴로운 파도, 보이지 않는 희망(?)에 지쳐갑니다.

 

희망이라니

문득 깜작 놀랍니다. ‘희망’이라니. 난민들이 이 죽음의 바다에 오는 것을, 물에 빠지는 것을 희망이라 말하다니. 내 마음이 이리 간사하다니 말입니다. 죽음에 떠는 난민을 구조하며 저는 어떤 ‘쾌감’을 느끼리라 믿는 걸까요. 그런 쾌감을 줄 난민이 오지 않아 지루한 걸까요? 이대로 멀미만 앓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게 두려운 걸까요? 난민을 자아 만족에 이용하고 싶은 걸까요? 난민의 목숨이 소중해서 여기까지 왔다면, 궂은 날씨에 난민이 없는 것 역시 다행스러운 것 아닌가요? 바다의 시간은 길고, 날씨가 궂을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거센 파도와 함께 찾아온 요괴들은 선원들을 잡생각에 빠뜨립니다.

바다는 까마득히 넓다. 시와치 호 구조대원들이 난민보트를 수색하고 있다. <사진제공=시와치>

못 가져서, 힘 없어서 고향을 떠난 난민

배는 리비아 영해기선 밖에서 난민들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해안에서부터 20킬로미터. 밤이면 먼 하늘로 트리폴리나 주와라 같은 리비아 대도시의 불빛이 비칩니다.

바로 저기 수평선 너머에 딴 세상이 있습니다. 내전으로 인한 무정부 통제 불능 상태. 그 틈을 타고 도시를 장악한 각 부족들. 부족간 타툼에 민간인들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그런 리비아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시리아, 소말리아 등 전쟁과 불안을 겪는 나라의 소시민들입니다. 강한 사람이라면,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소중한 고향을 두고 이리 먼 길을 떠나지는 않을 테지요.

세상은 늘 약자에게 매몰찹니다. 혹시 난민을 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떤지요. 저기 고향에서 핍박받다 어쩔 수 없이 떠난 이들을 손가락질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세상에 칼자루를 쥔 사람이 따로 있다면 이들은 그들이 아닙니다. 세상에 더 가진 사람이 있다면 이들 역시 아닙니다. 가진 게 없어서, 두려워서, 떨려서, 힘들어서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사진제공=시와치>

죽음의 바다

지중해는 난민으로 아우성입니다. 매일 수천여 명이 유럽행 보트를 타겠다고 몰래 밀입국자를 따라 해안으로 모입니다.

보트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10미터 보트에 160명 넘게 탑니다. 콩나물시루입니다. 사람 무게만 20톤에 달하는데, 보트는 고작 오토바이 엔진에 불과한 40마력 모터를 달았습니다. 그나마 남서풍 뒤바람을 받은 보트는 시속 7km로 겨우겨우 나아갑니다. 속초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는 거리입니다. 그 먼 길을 이 꼴로 가겠답니다.

지중해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국제 이주기구의 통계를 보면 지난 2016년 한 해에만 난민 30만여 명이 지중해를 건넜습니다. 이 중 5천여 명이 익사하거나 실종됐습니다. 5천 명이라니요. 이게 그냥 숫자입니까? 사람 수입니다. 우리는 5천 명과 5천 한명의 차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한 사람의 차이를 가슴으로 느끼고 있는지요. 두어 사람 더해진들 아무런 느낌이 없는지요. 세상이 아주 무섭습니다.

전 세계가 난민을 버렸습니다. 유럽연합은 한 해에 15만 명이나 구조한 이탈리아 마레 노스트럼(Operation Mare Nostrum)작전을 2014년 10월 중단했습니다. 2015년에는 모로코 접경지역에 난민을 막는 5미터 높이 장벽이 섰습니다. 각국 정부는 구조 작전을 접고 해안선을 순찰하는 쪽으로 선회했습니다. 명백한 죽음이 그제와 어제, 오늘 발생했고, 내일과 모레 있을 게 빤하지만 꿈쩍도 안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상황이 지금 이 바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해 5천여 명이 자연재해가 아닌 인간의 결정 탓에 익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록해야 할까요. 분명한 것은 이탈리아와 영국, 프랑스 등 모든 나라,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이 침묵의 동조자라는 겁니다.

 

5일째, 떼죽음

거친 남서풍이 부는 아침입니다. 오전 9시쯤 하얀 보트를 발견했습니다. 의아합니다. 이렇게 궂은 날씨에 보트를 타고 떠난 난민이 없을 텐데요.

가까이 접근했습니다. 고무보트는 거의 가라앉고 뱃머리만 간신히 떠있습니다. 보통 구조대는 구조를 마친 빈 보트는 혼란을 막기 위해 침몰시킵니다. 저 보트는 지난 밤 160여명을 수장시킨 겁니다.

구조대원들은 갑판 한 줄로 서서 빈 보트를 바라봤습니다. 이 새벽에 우리의 부모들과 자식들이 바다 밑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이름과 희망은 물론, 각자의 추억과 사연까지 남김없이 가라앉았습니다. 그들이 물에 빠졌을 때 하늘은, 바람은, 파도는 뭘했을까요? 우리의 달과 태양은 그들에게도 빛을 나눠줬을까요? 그렇다면 그들은 왜 죽은 걸까요. 저렇게 따뜻한 빛을 뿜는 달과 태양이 왜 그들을 외면했을까요. 그들은 개, 돼지처럼 죽었나요? 아니면 한 치라도 위엄이 있었나요?

우리의 작가들은, 우리의 언어는 이런 걸 뭐라 표현하던가요? 비극? 절망? 참혹함? 아니요. 사람이 겪지 못한 것에 이름은 없습니다. 신마저 버린 먼지 같은 이들이 있음을 우리는 말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난민’입니다.

남서풍이 부는 날 아침, 침몰한 배의 잔해를 발견했습니다. 사람은 온데간데 없고 배의 일부만 허망하게 둥둥 떠다닙니다. <사진제공=시와치>

고요한 죽음

얼마 후 우리는 보트 동쪽 3km 지점에서 흑인 여성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구명조끼를 입은 여자는 수면에 엎드려있었습니다. 얼굴을 물에 묻고 팔과 다리는 축 늘어졌습니다. 누구의 귀한 딸, 소중한 친구, 반려자, 엄마였을 테지요. 자주 웃었을 것이고요.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일말의 희망으로 리비아를 떠났을 텝니다. 여자의 주검 앞에 그 모든 게 없던 일이 됐습니다.

허망하게 끝나 버린 삶은 고요합니다. 처참한 광경은 역설적으로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수많은 죽음이 하나도 대수롭지 않은 아침이었죠. 배신자 같은 새벽이, 꼬마 난민 쿠르디를 삼켰던 새벽이 우리에게 그 아침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우니 물소리가 들립니다. ‘츄아아~ 츄아아~’ 그녀의 목숨을 앗아간 그 물이 바로 한 뼘 옆에서 그렁거립니다. 두렵습니다. 이전 시대의 지옥이 아우슈비츠였다면, 우리 시대의 지옥은 오늘의 지중해입니다. 세상의 바깥으로 나와 지옥과 경계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날은 새우처럼 웅크리고 잠들었습니다.

<하편으로 계속됩니다>

 

국제환경보호단체 ‘그린피스(Greenpeace)’와 난민구조단체 ‘시와치(Sea-Watch)’의 선박에서 항해합니다. 북극과 아마존, 파타고니아, 솔로몬제도 등 전 세계 이슈 현장에서 먹고 자고 숨 쉽니다. 인천일보에서 3년간 기자로 일했으며, <스물아홉 용기가 필요한 나이>의 저자입니다.

저작권자 © 월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