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이 책을 처음 펼쳐들었다. 마침 앞으로의 진로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고,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결론을 내린 터였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사람들은 깊이 있는 학문을 하려면 대학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궁금했다. 그곳에서 정말 깊이를 얻을 수 있는지, 그리고 진정 학문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말이다.

내가 만난 대학생들은 대부분 학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공부를 해서 시험을 보고 좋은 학점을 받은 뒤 취업을 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했다. 이공계열 학생들은 조금 사정이 나은 듯 보였지만, 소위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의 표정은 대체로 어두웠다. 취업하기 전까지 졸업을 최대한 미룬 후, 그래도 안 되면 대학원을 갈 계획이라고 했다. 석사 학위가 있으면 조금 더 수월하게 취업할 수 있지 않을까, 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나의 미래가 엿보였다. 어떻게든 먹고살 길은 찾아야 하니까. 아직 출발선에 발을 디디지 않았을 뿐 나도 머지않아 저런 삶을 살겠지, 생각하며 마음이 무거웠다.

『침묵의 공장』을 읽으며 한국 사회에서 학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층 더 깊이 고민해볼 수 있었다. 저자는 이야기한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국가, 자본, 테크놀로지가 이루는 삼각형이라고. 국가는 교육을 통해 국민을 제작하기 때문에, 대학에 대한 지배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자본에서 거리가 먼 학문일수록 대학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워지고, 테크놀로지와의 연관성도 점점 중요해진다. 이윤을 남길 수 있는지 여부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초래한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다. 자본에 가장 비판적이어야 할 인문학은 자본에서 나온 돈을 끊임없이 구걸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연구보다 연구비 신청서가 훨씬 두툼해지고, 연구 주제 역시 돈줄을 쥔 국가의 입맛에 맞춰 선정된다. 논문 역시 그 내용이 아닌 오직 등재지에 실리는가, 아닌가로 평가된다. 신문사의 대학 순위 역시 마찬가지다. 더 많은 연구비를 수주하고, 더 많은 논문이 등재되어야 더 높은 등수의 일류대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묻는다. 국가와 자본이 돈을 무기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대학의 인문학이 어떻게 인문학일 수 있냐고. 그러면서 덧붙인다. 국가가 던지는 연구비를 열망하면서 감격하는, 혹은 정당화하는 인문학은 더 이상 인문학이 아니라 관학이라고. 인문학자들이 관(官)학자, 또는 관변(官邊)학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무엇일까. 학문으로부터 국가, 자본, 테크놀로지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들과 보다 신중히 관계를 신중하게 맺고, 그 관계를 통제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실현 가능한 방안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는 쉽지 않다. 연구자들은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학생들은 취업을 해야 한다. 자본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또 다른 자본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역설이다. 인문학을 공부하고픈 나는 어떤 길을 택해야 할까. 미래는 밝지 않고, 마음이 매우 무겁다.

저작권자 © 월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