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의영 피치마켓 대표.

[월요신문 김미화 기자] “지적·발달장애인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해 정보의 평등을 이루는 것이 목표다.”

함의영 피치마켓 대표의 운영 철학은 단순하지만 뚜렷했다. 지난 2015년 4월 문을 연 피치마켓은 지적·발달장애인을 위한 책을 만드는 비영리단체다. 이곳에서는 기존의 책을 지적·발달장애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번안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적·발달장애인이 성인이 돼서도 동화책을 읽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맞는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피치마켓. 이곳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달 27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피치마켓을 찾았다. 들어서자마자 책장을 채운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 몇 권을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보자 “모두 느린 학습자를 위해 번안한 책”이라는 함 대표의 설명이 들려왔다. ‘느린 학습자’는 피치마켓에서 지적 지능 등을 이유로 학습 속도가 느린 친구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문해력이 낮은 친구들을 위해 만들어진 책은 어떤 모습일까. 함 대표가 건네 준 책들을 들춰보자 가장 먼저 그림이 그려진 등장인물 소개란이 눈에 띄었다. 특징을 살린 얼굴과 함께 상세한 설명이 적혀 있다 보니 인물에 대한 이해가 한결 쉽다고 느껴졌다. 책을 구성하고 있는 문장들의 경우, 짧고 간결하게 이뤄져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외에도 쉬운 단어 사용, 친숙한 삽화,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설명상자 등 책 곳곳에서는 느린 학습자를 위한 배려가 엿보였다.

번안된 책의 종류 또한 풍성했다. 알퐁스 도데의 ‘별’과 ‘마지막 수업’, ‘어머니’,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 O.헨리의 단편집 등 익숙한 세계 명작들부터 조선 시대 설화를 담은 ‘어우야담’, 자기계발서 ‘우드앤브릭’까지 다양한 색깔의 책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적·발달장애인들을 위한 책을 만들게 된 계기에 대해 묻자 함 대표에게서 처음부터 어떤 목표로 가지고 시작했던 일은 아니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함 대표는 “‘쉬운 글을 만들어보자’라는 취지로 스터디모임을 했었다. 당시 어떤 게 쉬운 글인가를 가지고 논의를 했었다. 그때 발달장애인 동생이 있는 한 멤버가 발달장애인이 읽을 수 있을 때까지 문장을 쉽게 다듬어보자는 의견을 냈다. 그게 피치마켓의 시작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당시에 회사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사비를 털어서라도 지적·발달장애인을 위한 책 한 권을 만들어보자는 게 목표였다. 그러다 한 권이 두 권이 되고, 책임감을 가지게 되면서 피치마켓을 설립하게 됐고, 본격적으로 지적·발달장애인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피치마켓'에서 번안한 책들.

독자가 정해져있다 보니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 또한 남다를 터. 기존의 책을 쉽게 읽히도록 번안하는 일은 들여다보니 그 과정이 꽤나 복잡했다.

지적·발달장애인들은 인지능력이 낮고, 단기 기억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작품 속에서 여러 사건들이 복잡하게 엮이면 혼란을 겪게 된다. 갑자기 등장인물이 많아진다거나 화자가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뀌는 것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피치마켓에서는 일차적으로는 작품 속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연대기 순서대로 아예 재구성 하는 작업을 한다. 이때 작품 속 큰 맥락이나 주요사건들은 동일하게 가져간다. 시점을 통일시키고, 자연스럽게 글이 읽힐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다음 순서다. 그 뒤, 작품 속 단어 하나하나를 쉬운 단어로 바꾸는 작업이 이뤄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초고는 지적·발달장애인들에게 직접 감수를 받게 된다. 그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텍스트만으로는 발달장애인들이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에 소량으로 ‘감수용’ 책을 만든다. 그 후 그들의 피드백에 따라 문장을 다듬는다. 보통 퇴고 과정은 30-40번 이뤄진다. 품이 많이 드는 일로, 누군가는 비효율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이 과정을 묵묵히 견디는 데는 함 대표의 의지가 컸다. 함 대표는 “피치마켓의 목표는 지적·발달장애인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읽고 난 후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저희는 기존 도서를 읽은 비장애인과 피치마켓에서 번안한 도서를 읽은 발달장애인이 동일한 정보를 갖게 돼 무리 없이 대화가 가능한 일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피치마켓이 있기 전까지 지적·발달장애인들에게는 마땅한 읽을거리가 없었던 게 현실이었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많지 않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전래동화만 읽어야했던 것. 하지만 이들을 위해 새로운 언어로 구성된 글이 필요하다는 게 함 대표의 생각이다.

그는 “간혹 지적·발달장애인이 인지능력이 낮으니까 전래동화를 읽혀야 된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인지능력이 낮다고 해서 어린애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청소년기가 되면 전래동화를 읽는데 대해 창피함을 느낀다. 연령에 따라서 비장애인들이 갖는 관심사를 똑같이 갖게 된다. 때문에 거기에 맞게끔 콘텐츠가 제공이 돼야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적·발달장애인이 이해 가능한 글을 통해 문학의 즐거움을 느끼고 정보를 습득함으로써, 사회와 소통하고 나아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현재 피치마켓에서는 11권의 책을 번안했으며, 다음 달 안으로 3권을 추가 출판 할 예정이다. 함 대표는 “처음에는 일 년에 한 권 정도 책을 만들 수 있었다. 당시에는 세상에 없던 책을 만드는 일이 어렵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이 생겨 두 달에 한 권을 만들 수 있게 됐다”라며 “피치마켓에서 나오는 책을 모두 다 만족할 수는 없다. 인지능력과 문해력은 개인차가 심하다. 어떤 분들은 같은 책을 읽어도 너무 쉽게 읽힌다고 하고, 어떤 분들은 이 책은 어렵다고 한다. 작품마다 난이도를 설정해 번안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피치마켓은 번안하는 책으로 ‘청소년 필독서’를 중점적으로 선택하고 있다. 전래동화를 읽던 친구들이 다음 단계로 읽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다 택한 방안이다. 함 대표는 “지적·발달장애인을 가르치는 특수 교사들과 논의를 많이 했다. 비장애인 친구들이야 여러 가지 책을 권할 수 있지만, 지적·발달장애인 친구들은 책 한 권 읽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다른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해 비장애인 또래들이 필수적으로 읽게 되는 책을 중심으로 작업을 해보자고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피치마켓' 에서 진행한 발달장애인 독서아카데미의 활동 모습.<사진=피치마켓>

피치마켓에서 번안한 책들에 대한 반응은 긍정적이다. 한 특수교사는 “(번안된) 책을 읽고 나서 아이들의 이야기 거리가 달라지게 됐다”고 피치마켓에 연락을 줬다. 발달장애인은 단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일반적인데, 책을 읽고 난 후 책 속 어휘를 습득해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

O.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읽고 나서 작품 속 주인공들에게 연민을 느낀 발달장애인 친구가 눈물을 흘렸다는 연락도 받았다. 함 대표는 “그 친구가 감정 이입을 하거나 상대에 대해 공감을 하는 일을 못하던 친구였다고 하더라. 책을 읽고 슬픔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워 담당 교사가 전화를 줬었다”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한 발달장애인은 피치마켓에게 “40년 만에 처음으로 책을 읽었다”라며 감사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함 대표는 “그때 경제적으로 어려워 이 일을 계속 하는 게 맞을까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그 편지를 보고 모든 슬럼프가 극복됐다. 보람도 느꼈고, 감사함도 느꼈던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현재 피치마켓에서는 책을 번안하는 일 말고도 지적·발달장애인을 위한 다양한 활동도 진행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독서교실이다. 독서교실은 일주일에 삼일은 발달장애훈련센터, 하루는 중앙도서관에서, 하루는 특수학교에서 운영되고 있다. 함 대표는 “저희가 책만 낸다고 일이 끝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적·발달장애인 친구들에게 독서 문화를 형성한다는 차원에서 부수적으로 독서활동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실생활에서 지적·발달장애인의 정보 불평등을 없애기 위한 활동을 하는 것도 피치마켓이 힘쓰고 있는 일 중 하나다. 피치마켓은 지난 5월 치러진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발달장애인용 쉬운 대선후보 공약집을 펴내기도 했고, 그림이 포함된 쉬운 근로계약서를 만드는 일도 진행했다.

피치마켓은 또 특수학교 학생들을 위한 도서 무료 배포도 하고 있다. 피치마켓이 연간 전국 초, 중, 고등학교에 기부하는 책은 6000권에 이른다. 함 대표는 “피치마켓에서 나오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돼서 수익구조가 생기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여러 친구들에게 많이 읽히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느린 학습자 속도에 맞춰 걸어가는 피치마켓. 향후 계획을 묻자 함 대표는 “기본적으로 책을 번안하는데 집중하고 싶다. 저희는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양한 책들을 다룰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공공기간에서 카피만 안했으면 좋겠다. 같이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면 좋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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