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총회 한미 기조연설 키워드 깊이보기

<사진=뉴시스>

[월요신문=김혜선 기자] 21일(현지시간) 문재인 대통령이 제 72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내세운 키워드는 ‘평화’로, 이 단어는 22분간의 연설에서 32회 언급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조연설에서 ‘자주적인(sovereign)’, ‘자주권(sovereignty)’ 같은 단어를 21번 썼다. 두 정상이 인용한 역대 미국 대통령도 북핵 문제를 바라보는 두 정상의 미묘한 차이를 가늠케 했다.

이날 문 대통령은 대북 정책과 관련, “국제사회가 북한이 스스로 핵을 포기할 때까지 강도 높고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면서도 “우리의 모든 노력은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일관성 있게 끌어온 ‘강도 높은 제재’와 ‘대화 추진’이라는 투트랙 대북정책을 재확인한 것.

문 대통령은 “자칫 지나치게 긴장을 격화시키거나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로 평화가 파괴되는 일이 없도록 북핵문제를 둘러싼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해 나가야 할 것”이라며 “도발과 제재가 갈수록 높아지는 악순환을 멈출 근본적인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유엔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 내용 직후 문 대통령이 인용한 문구가 레이건 전 대통령의 ‘평화’ 발언이다. 문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말을 인용해 “평화는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분쟁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다루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사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전형적인 ‘보수의 아이콘’으로, 미국 보수주의 정당인 공화당 출신 인사다. 그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평화’를 주장하며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지칭하고 소련을 사정거리에 넣는 중거리 미사일을 유럽에 배치하는 등 소련에 강력한 군사압박정책을 썼다. 군사 옵션으로 인한 북핵 문제 해결이 아닌 외교적·평화적·정치적 해결을 강조하는 문 대통령의 소신과는 다소 어긋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군비 경쟁’으로 치닫던 미-소 관계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키고 냉전종식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두번째 임기 막바지에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냉전종식의 발판이 된 중거리 핵무기 감축협정(INF)을 맺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뒀다.

이 같은 성과는 1986년 10월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을 기반으로 한다. 당시 회담에서는 어떠한 성과도 얻지 못했지만, 양국은 국비 축소에 대한 상대방의 의지를 확인하고 서로의 협상 카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레이캬비크 회담은 ‘실패했지만 성공한 회담’인 셈이었다.

한편, 지난 19일 트럼프 대통령이 기조연설에서 택한 인용문은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의 것이었다. 레이건 ‘냉전 시대의 종식’을 마련했다면, 트루먼은 ‘냉전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기에 의미심장하다.

트럼프는 트루먼이 ‘마샬 플랜(Marshall Plan)’ 실행을 위해 1947년 12월 19일 미 의회에 보낸 메시지를 인용했다. 당시 트루먼은 “유럽의 회복을 위한 우리의 지지는 유엔에 대한 우리의 지지와 완전히 일치한다. 유엔의 성공은 회원국의 독립적인 힘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마샬플랜’이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화 된 서유럽 16개 나라에 미국이 1947년부터 1951년까지 행한 대외원조계획이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은 ‘세계 도처에서 자유가 위협받을 경우 미국이 막아 주겠다’는 내용의 ‘트루먼 독트린’을 선포하고 소련의 정치적 고립을 주도하는 한편, 강력한 경제 원조 정책인 ‘마샬플랜’을 시행해 당시 유럽에 확산되던 소련의 공산주의 대신 미국의 자유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이념을 전파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미국과 소련은 지난한 냉전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트럼프는 연설에서 “마샬 플랜은 각 국가들이 강하고, 독립적이고 자유로울 때 전 세계가 더 안전해진다는 숭고한 이념에 따라 만들어졌다”며 “우리는 모든 국가가 두 가지 핵심 주권 임무, 즉 자신의 국민의 이익과 모든 다른 주권 국가의 권리를 존중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외교 분야에서 우리는 이 ‘자주권의 원칙’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내용은 미국의 ‘힘’을 우선시 하고 강화시키는 트럼프 캠프의 선거 구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를 연상케 한다. 트럼프는 연설에서도 북한을 향해 “완전파괴” 등 강경 발언을 쏟아놨다.

트럼프는 “미국의 주권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노력하는 것은 세계 정상들도 그들의 국가 주권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 앞에 놓인 도전 과제에 성공적으로 대처하는 희망은, 트루먼 대통령이 70년 전에 말한 것과 같이, ‘회원국의 독립적인 힘’에 달렸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미국 매체 더아틀랜틱은 “트럼프가 말하는 ‘자주권’은 미국 국경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동시에 미국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나라에 미국이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제국주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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