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신문=김은수 기자] 미투운동은 검찰내부, 문단, 극단, 종교 각계각층의 성과 관련된 만행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연이어 터져나오는 피해자들의 #me too 해쉬태그를 보고 있노라면 '~계'라는 표현으로 나눠놓은 범주들이 무색하고 덧없이 느껴진다. 응당 지켜져야 하는 상식은 남녀 관계 앞에서 무참히 깨졌다. 사회적 의무와 책임은 당장의 욕망 앞에서 매가리를 잃었다. 

가해자의 공식입장문에서 "자신이 괴물같았다", "(스스로에게)혐오감이 느껴진다"라는 표현들이 눈에 띤다. 그 행위가 일어날 당시, 그들은 자기검열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여성보다 단순한 물리적 힘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 있어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무엇이 무섭단 말인가. 정보의 파급력으로 인해 당장 눈앞의 삿대질이 무서워 내뱉는 반성어린 말에 과연 진정성이라는게 있는 것인가. 잠깐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는 문제다. 

남녀문제는 결국 권력문제다. 힘을 가진 자가 힘을 가지지 못한 자를 누르는 이 간단한 법칙으로 힘을 가진 기득권들은 사회가 합의한 윤리들을 너무 쉽게 해체시켜왔다. 미투운동에 올라온 고발글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남녀의 위계차이를 이용해 여성들에게 가해진 무자비한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미투운동은 페미니즘의 궤와 정확히 일치한다. 둘다 평등하지 않은 남녀의 권력차에 의해 발생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남녀간의 구분을 없앤다로 출발하는 이 당연하고 상식적인 운동이 '과격하다', '지나치다', '역차별을 지향한다'는 논리로 미투운동과 엮어져 공격받고 있다. 공격은 강할 수 밖에 없다. 기득권들은 으레 자신이 당연하게 누릴 권리를 뺏기고 싶지 않아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운동은 항상 정치적으로 이용당해왔다. 대표적으로 상대당을 까내리기 위해 반페미 발언을 한 의원들을 언론과 포탈에 제보하는 방식이다. 페미니스트들이 가서 우루루 상대 당의 발언자를 패주니 자신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는 심산이다. 미투운동 역시 그럴 위기에 처해있다.

얼마전 뉴스공장의 진행자 김어준이 자신의 팟캐스트에서 '보수가 미투를 이용해 진보적 文정부 지지자들을 분열시킬 수 있다'고 예언했다. 보수진영이 미투운동의 가해자들을 나열해놓고 진보인사 색출에 나서면서 그 예언은 적중했다. 실제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2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소위 미투운동이 좌파문화 권력의 추악함만 폭로되는 부메랑으로 갈 줄 저들이 알았겠는가"라고 발언한 바 있다.

김어준과 홍준표의 의도가 어떻든 각종 포탈사이트에서는 진보 인사 문제있다느니 상대편 당에 대한 정치모략이니하는 논의로 들썩 거렸다. 초점이 미투운동의 고발내용이 아니라 진보와 보수의 알력다툼으로 옮겨진 것이다.

문득 초원 복집 사건이 떠오른다. '우리가 남이가!'로 지역감정을 탄생시킨 김기춘은 '도청 프레임'으로 사태를 역전시켰다. 김기춘이 프레이밍으로 불리한 판을 뒤집은 것처럼 대중은 프레이밍에 너무 쉽게 교란된다. 

여성인권의 보호가 최우선이 되어야 할 미투운동을 정치 진영의 프레이밍 공작에서 지켜내야만 한다. 프레이밍 싸움에서 진 결과는 참담하다. 문제의 본질은 사라지고 사건은 시들하게 잊혀진다. 

문단계 거장의 성희롱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문단으로부터 십년 동안 외면 받아온 최영미 시인이 뉴스룸 인터뷰에 나왔다. 페미니즘 특집의 시를 기고하며 "내가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연신 떨리는 목소리로 울컥 밀려드는 감정을 억누르며 자신의 피해사실을 회고하던 그녀의 용기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미투운동의 본질을 사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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