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속 슬로우 여행지를 찾아서

 
도시 속 전주한옥마을은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전해준다.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국내 최대 규모의 한옥마을은 우리의 전통을 사람들에게 혹은 외국인관광객들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흔하게만 생각했던 한옥이 멋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우리 전통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마음까지 전해지기 때문이다.

가지런히 놓인 까만 기왓장 지붕이 편안하게 들어온다. 낮은 담장 너머, 한줄기 햇빛이 제자리를 찾았다며 대청마루에 앉는다. 골목길 걸으며 지나치는 집마다 다른 듯 비슷한 포근함이 마당에 가득하다.
한옥이 하나둘 모여 마을을 이룬 곳은 많지만 아쉽게도 도시에서는 그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다. 도시개발 바람 속에서 버텨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태까지 한옥마을을 유지한 몇 곳이 전통문화의 자랑으로 손꼽히는 명소로 불리기도 한다. 오랜 세월 한옥마을을 지탱한 기반이 무엇일까. 해답을 찾아 국내 최대 규모 한옥마을이 있는 전주시로 향했다.
 
한옥마을의 유래
 
전주로 넘어가는 관문이 인상적이다. 기차를 타고 전주에 도착하면 역 건물이 한옥 형이고, 고속도로로 진입하면 전주 톨게이트 위로 단아한 기와지붕이 있다. 예향의 고장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싶다. 조선시대의 전주는 전라감영이 위치했던 곳이다. 덕분에 정갈한 음식, 수준 높은 예술 활동이 발달할 수 있었다. 전주에서 진행되는 한지, 비빔밥, 영화 등 관련 축제가 다양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하다.
 
“온전하다, 순수하다, 어우르다”, 우리말 ‘온’ 한 글자에 담긴 뜻이다. 한자로 의역하면 ‘완(完)’ 또는 ‘전(全)’으로 바뀌는데, 여기에 전주 지명의 유래가 담겨 있다. 백제시대에는 ‘완’이 사용된 ‘완산’이라 불렀고, 삼국을 통일한 경덕왕에 들어서 ‘전’을 사용한 ‘전주’ 지명을 사용했다.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는 전주에 대해 “인물이 번창하고 가옥이 즐비하며 백성의 성품이 질박하지 않고 선비는 행동이 신중하다”고 표현한 바 있다. ‘온’에 담긴 뜻이 전주와 통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주시 풍남문의 동쪽, 풍남동은 일제강점기에 한옥을 지으며 거주민이 똘똘 뭉친 의미 깊은 곳이다. 당시 풍남문을 기준으로 서쪽 가까이 일본인이 대거 거주하기 시작해 상권도 일본인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이에 반대편 풍남문의 동쪽에서 시작한 움직임이 있으니, 한옥 촌 형성이다. 민족적 자긍심을 드러내기에 한옥만 한 것이 더 있겠는가. 골목이 좁아도 상관없다는 듯 오밀조밀하게 형성된 한옥마을의 바닥에는 일제에 저항하고자 하는 정신이 깔려 있다. 약 70년 전, 풍남문에서 바라본 서쪽은 일본인, 동쪽은 선조의 한옥으로 대립구도가 선명히 드러났을 것이다.
 
반세기가 흐른 지금, 그 세월의 흔적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자리가 오목대라는 곳이다. 이번 여정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오목대에 가기 전 가까운 관광안내소에서 관광지도 소책자를 챙기고 궁금한 점도 물어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소답게 이정표와 안내판이 충분하게 설치돼 관광지도 하나만 있으면 전주한옥마을 어디든 쉽게 찾을 수 있다.
 
오목대는 작은 둔덕 정상에 있다. 천천히 올라도 10분이면 충분하다. 오목대는 고려 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본향인 전주에 들러 여러 종친과 승전고를 울리며 자축한 곳이다. 이후 고종이 친필로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는 비문을 새겨, 태조 이성계가 머무른 곳이라 전하고 있다.
 
오목대 근방 데크에서 북서방향으로 전주시내 전경이 펼쳐진다. 멀리 보이는 풍경에 완만한 평야와 나지막한 산세가 놓였다. 좀 더 아래로 빌딩이 솟았으며 그 빌딩과 자신 사이에 까만 기왓장 지붕이 빽빽하다.
 
전통과 현실이 공존하는 곳
 
지도 상 전주는 노령산맥이 관통하는 위치다. 자세한 지리를 살펴보면 다른 양상을 띤다. 노령산맥이 풍남문을 중심으로 일정 거리를 두고 기린봉, 고덕산, 남고산, 모악산, 완산칠봉 등으로 숨을 죽인 채 지나간다. 노령산맥의 배려일까. 분지가 생기고, 전주천이 흐르며, 평지가 완만하니 이렇게 살기 좋은 곳이 호남아래 어디 있을까 싶다.
 
근방으로 한옥뿐만 아니라 풍남문, 향교, 경기 전 등 볼거리가 수두룩하다. 역시 한옥마을 바닥에 흐르는 저항정신이 도시로 변모하는 전주 속에서 문화재를 지키고자 하는 옹고집으로 발현한 덕분이리라. 옛 모습을 지키려 부단히 노력했을 전주시민의 땀과 노력이 느껴진다.
 
상당히 넓게 퍼진 한옥마을 중, 이번 여정은 동쪽의 술도가길, 서쪽의 경기전길, 남쪽의 태조로, 북쪽의 어진 길로 둘러진 안쪽 구역을 경기 전과 오목대를 기점으로 회귀하는 코스다. 본격적으로 한옥마을 골목으로 들어서기 전, 술도가 길을 걷는 동안 빌딩과 한옥의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조화에 적응해 보자. 한옥 옆의 사각빌딩은 하늘을 향해 거칠게 솟은 듯하고, 사각빌딩 옆 한옥은 유하게 흐르는 지붕이 하늘을 담은 듯 예쁘다.
 
전주한옥마을이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거주민의 비율이 줄어들고, 한옥은 게스트하우스·음식점·카페·문화 공간 등으로 활용되는 빈도가 증가했다. 옛 한옥촌의 다정함은 상상으로 채워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낮은 담장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하던 당시의 모습이 쉬이 떠오르고 곧 향수에 젖어든다.
 
시간이 흐르는 둥 마는 둥 정적이 감도는 골목길, 괜히 한 발걸음, 한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자연스럽게 느린 걸음으로 골목길을 서성이듯 걷는다. 어느 골목길은 고고하면서 단아하고, 방향을 틀어 다른 골목길에 접어들면 손때 묻은 회색 담 벽 아래로 아기자기한 화초의 화분들이 놓였다. 특히 6070세대에게 이 길은 특별하다. 옛 추억이 하나둘 살아나는, 당신의 힘들었고 보람찼던 하루 속 지나쳤을 법한 그 골목길이다.
 
차량이 다니는 일방통행 도로가 나오고 길가에 작은 수로가 있다. 마치 논가에 흐르는 작은 실개천 같은 느낌이다. 다닥다닥 붙은 집 사이 골목길을 다니다가 좁지만, 졸졸 흐르는 물가를 따라 걸으니 시원하다. 이 수로를 따라 곳곳에 작은 정자와 분수대가 마련돼 잠시 쉬어가기에도 좋다.
 
수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 보면 경기 전 이정표가 나온다. 경기 전은 조선왕조를 세운 조선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태종 10년에 창건됐으며 당시 이름은 ‘태조진정’이라 했다. 세종 24년에 진전을 ‘경기 전’으로 개칭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경기 전을 돌아보면서 태조 이성계의 본향 전주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경기 전을 둘러보니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기 시작한다. 다시 오목대에 올라 석양 아래 전주시내, 한옥마을의 풍경을 감상하러 가보자. 지나갔던 길이 풍경 속에서 도드라진다. 이번 코스는 전주한옥마을의 반의반도 보지 못한 거리다. 그렇다고 서두르면 골목길의 제 맛을 느낄 수 없다. 느긋한 마음으로 그날에 허용된 시간만큼 걷고 느끼는 것이 전주한옥마을에게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자 향수다. ‘천천히 둘러보는 맛’이 두고두고 전주한옥마을을 찾게 만드는 매력이 아닐까. 해가 지고 하나둘 불을 밝히는 전주시내의 야경으로 마무리하니 깔끔하게 끝난 기분이다.
 
번잡한 도시의 시끄러움은 그것대로 흐르도록 내버려두자. 사각빌딩이 여기저기서 하늘로 거칠게 우뚝 솟아버리는 그 도시는 잠시 잊고 걷자. 땅 가까이 나지막한 자세의 한옥, 유하게 흐른 기와지붕이 하늘을 받치고 있는 마을에선 그 도시를 잠시 잊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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