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빈소에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사진=뉴시스

[월요신문=성유화 기자]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별세했다. 향년 92세의 김 전 총리는 지난 23일 오전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119 구급대에 의해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병원 측은 설명했다. 김 전 총리는 노환으로 별세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총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3김시대'를 이끈 근대 한국 정치계의 거목으로, 이제 현대정치사를 쥐락펴락했던 3김씨는 모두 역사 속에 남았다.

JP의 정치적 별명은 ‘풍운아’였다. 5ㆍ16으로 권력의 핵심에 섰지만, 2차례나 원치않은 외유를 떠나야 했다. 또 라이벌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 탄생에 결정적 역활을 했지만, ‘팽(烹)’ 당하곤 했다. 2인자였기에 시련도 많았지만, 그 때문에 정치 역정 속에서도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김 전 총리는 역대 주요 정치인 가운데 최고권력 2인자부터 3(金)시대 ‘킹메이커’였다. 이후 국무총리 등 대통령 바로 아래서 활동하며 역사상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총리로 군림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남긴 정치 행보는 ’기록‘ 그 자체가 됐다. 30대 나이에 집권여당 대표, 40대와 70대 두 차례 국무총리, 9선 국회의원, 2차례 정계은퇴와 부활까지1961년부터 2004년까지 그의 정치 인생은 기록의 연속이였다.

김 전 총리는 1961년 5월 16일 처삼촌인 당시 박정희 소장의 5·16 쿠데타를 육사 8기 출신으로 중령로서 적극 도우면서 현대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해, 5·16 쿠데타의 주역으로 꼽혔다. 이후 '권력 1인자'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중앙정보부장, 민주공화당(공화당) 의장, 국무총리 등 박정희 정권에서 권부 요직을 두루 거치며 '2인자'로 부상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면서 5·16 쿠데타 세력도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었지만, 김 전 총리는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시기를 지나 신민주공화당 총재로 정치적 변모를 보였다. 김 전 총리는 이 때부터 2인자에서 킹메이커로 자리매김이 시작됐다.

신민주공화당 총재 시절이던 1990년 1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를 만나 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을 선언하고, 그 결과물인 민주자유당(민자당)에 참여했다. 김 전 총리는 바로 그 민자당의 최고위원이 돼,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같은 당 김영삼 후보를 대통령으로 ‘킹메이킹’ 했다.

그러나 김 전 총리와 김영삼 전 대통령은 내각제 실시 등을 놓고 갈등했다. 결국 1995년 민자당을 탈당한 뒤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고, 이 자민련을 이끌어 이듬해 총선에서 무려 50석을 얻으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김 전 총리는 영, 호남에 견주어 세가 약한 충청권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1997년 대선에서도 또 다시 '킹메이커'를 택했다.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와 이른바 'DJP연합', 즉 김대중 후보로 단일화를 한 것.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물론, 김 전 총리 등 5·16 쿠데타 세력의 최대 정적일 뿐만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대척점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정치사의 가장 놀라운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결국 김대중 전 대통령은 'DJP연합'을 밑거름으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김 전 총리는 김대중 정부의 공동 창업자 성격으로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역임 당시 김 전 총리는 대통령 보좌는 물론 직접 국정 현안을 컨트롤하는 등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힘 있는 총리로 꼽히고 있다.

세간에서는 김 전 총리를 완고한 지역주의와 1인 보스의 리더십에 의존한 ‘3김 정치’도 유권자의 정치의식 향상에 따라 실질적으로 종언을 고했다는 평가한다.

한편, 정부는 국민훈장 가운데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등급 훈장인 무궁화장을 고려하고 있다. 빈소를 방문한 이낙연 총리는 “현대사의 오랜 주역이고 총리였기 때문에 공적을 기려 정부에서 소홀함이 없게 모시겠다”고 했고, 김부겸 안전행정부 장관은 “민훈장 최고 등급인 무궁화장으로 결정됐다”고 밝혔다.

김 전 총리의 별세 관련 민주당 박범계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고인의 삶은 말 그대로 명암이 교차했다”면서도 “고인의 정치 역경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살아가는 후대에게 미루어 두더라도, 고인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로 기억될 것”이라고 전했다.

자유한국당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경제발전을 통해 10대 경제대국을 건설하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고 했고, 바른미래당도 “고인이 대한민국 정치사에 남겼던 큰 걸음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야 할 때”라고 긍정적인 반응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김 전 총리의 훈장추서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칼럼니스트 황교익씨는 자신의 SNS를 통해 “김종필은 총으로 권력을 찬탈했고, 독재 권력의 2인자로서 호의호식했다. 민주주의를 훼손했다”고 밝혔고, 군인권센터도 “외적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본연의 임무를 잊고 권력을 탐하는 '정치군인'의 원조”라며 훈장 추서에 반대했다.

김 전 총리의 훈장 추서에 반대하는 이들은 5.16 군사쿠데타의 주인공으로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고, 한일어업협정과 군사정권의 인권탄압 등 그늘도 적지 않다는 점을 들어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저작권자 © 월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