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왼쪽부터 철도인 출신 독립운동가 이봉창, 이길용, 전진원./사진 = 코레일

[월요신문=지현호 기자] 일제의 탄압에 맞서 만세운동이 한창이었던 1919년 3월. 그 역사의 현장에 철도인들도 있었다. 1919년 3월 27일, 용산 철도공장에서 일하던 900명의 철도인들은 일제히 퇴직하며 3·1운동에 참여했다. '용산 철도노동자 동맹파업'이다.

당시 독립운동 상황을 전하던 지하신문 '진민보'는 3월 제2호에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철도에 종사하는 사람이 전국에 4000여명 되는데 대부분 동맹파업을 결행하기로 결의했으므로 멀지 않아 여러 철도 노선의 운행이 중단될 것"이라고 실었다.

특히 용산은 당시 대륙진출을 노리던 일본의 교통거점이자 철도 산업의 중심이었다. 이에 용산역에서 일하던 철도인 900명이 일제히 파업을 선언한 것이다. 최첨단 산업인 철도 운행을 중단시켜 일본에 큰 타격을 입힌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철도인 출신의 독립운동가도 있다. 1932년 동경 요요키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던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가 대표적이다.

이봉창 의사는 1919년 8월 약국에서 일하며 알게 된 철도국 영업과 화물계 서기인 일본인 이노우에 사카이치의 도움으로 용산역 말단 직원으로 채용됐다. 철도 연결수로 일하던 행정부서인 조차계로 전근을 꿈꾸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철도인으로 생활하며 일본인의 차별과 학대를 겪은 그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키웠다. 결국 1924년 사직서를 낸 그는 1930년 12월 중국 상해로 떠난다. 1931년 한인애국단에 가입, 일왕 폭살계획을 준비한 이봉창 의사는 이듬해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폭탄을 던지고 체포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반일 격문 수송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생의 일장기를 지워 보도한 이길용 열사도 철도인 출신이다. 1919년 남만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에서 철도수송업무를 맡았던 이길용 열사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인쇄한 반일 격문 '대한독립 1주년 기념축하 경고문'을 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수감생활 후 동아일보 체육기자로 활동한 그는 일명 '일장기 말소사건'을 일으킨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워버리고 보도한 것. 이 일로 이길용 열사는 투옥됐고 동아일보에서 해직당했다.

상해 임시정부와 국내 본부간 연락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전진원도 있다. 각 역의 역무와 열차의 승무원으로 26년간 철도인 생활을 한 그는 1919년 중반 스님 이종욱이 서울에서 연통제 국내 본부를 조직하면서 대동단, 청년외교단 등과 접촉할 때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공무 관계연락으로 위장하고 동삼성 안동역(현 단동)으로부터 무기와 각종 기밀서류를 들여왔다. 예정된 시간에 서강이나 동막(마포) 철도변을 통과하면서 서류뭉치를 던지면 그 가족이 주워 이종욱 등 청년외교단원에게 전달하는 식이었다. 한성임시정부 창단 멤버였던 그는 1931년 2월 8일 경동철도주식회사 근무 중 열차충돌사고로 순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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