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림프종 근로자 산재 판정에 올 초 취소소송 ‘뭇매’
질병·근무환경 역학관계는 부정…반올림 “악질 사례” 비판

고(故) 이가영씨 빈소/사진=반올림

[월요신문=고은별 기자] 반도체 작업장에서 일하다 악성림프종에 걸린 근로자가 산업재해 판정을 받자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취소소송을 낸 서울반도체가 해당 소송을 취하하기로 했다.

그러나 근로자는 이미 고인(故人)이 됐고 유가족은 회사의 처사에 지우지 못할 상처를 입었다. 회사는 작업환경측정결과를 토대로 근로환경과 질병 간 연관성을 부정하는 한편, 기업의 비인간적인 행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대두되고 있다.

10일 서울반도체에 따르면 회사는 이날 오전 노사협의회를 열어 올해 초 근로복지공단에 제기한 고(故) 이가영씨 산재 인정 취소소송을 취하하기로 결정했다.

서울반도체 관계자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당사는 유가족의 요청에 따라 산재 인정 취소소송을 취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소송 취하 관련한 세부 일정은 아직 해당 부서에서 공유받지 못했다”고 부연했다.

앞서 서울반도체에서 2015년부터 근무한 이씨는 2017년 9월 악성림프종(역형성 대세포 림프종)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이어오다 지난 8일 숨졌다. 그는 지난해 10월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재 인정을 받았고, 올해 초 서울반도체는 공단에 산재 인정 취소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서울반도체는 산재 취소소송을 취하하기로 하면서도, 이씨의 사망과 근로환경 간 역학관계는 부정했다. 서울반도체는 “근로복지공단은 작업환경측정결과를 토대로 검출된 유해물질이 없거나 미량이고 노출 수준이 낮다고 인정하면서도, 지난해 8월 발표된 고용노동부의 산재 인정 처리절차 변경방침에 따라 역학조사 없이 해당인의 산재 신청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서울반도체는 당사 작업장에 대한 작업환경조사에서 1급 발암물질인 벤젠이 검출되지 않았고 포름알데히드 또한 미량 검출돼 산재 역학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서울반도체 측은 “벤젠 혹은 포름알데히드에 노출됐어도 해당 질병과는 인과관계가 없다는 다수의 논문 및 전문가 견해가 존재한다”며 “당사는 서울반도체 사업장이 완벽히 안전하다는 것을 보다 명확히 밝혀나가기 위해 산재 취소를 요청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작업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 유방암, 악성림프종 등 직업병을 얻는 사례는 지속 발생하고 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에도 현재까지 약 600건 이상의 피해사례가 제보, 140여명이 산재를 신청했다.

반올림은 이번 서울반도체 사태와 관련해서도 유가족 입장에서 회사 입장을 전면 반박했다. 반올림은 “작업환경측정결과만으로는 근로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서 반올림은 전날(9일) 서울반도체 노사협의회에 의견서를 보내 “작업환경측정 제도는 필요한 것이지만 안전을 충분히 보장하는 제도가 아니”라고 전했다. 반올림은 ▲공기 노출 외 노동자들이 유해물질에 노출되는 점을 잘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 ▲측정업체를 회사가 선정하는 제도가 낳는 문제 ▲법정 측정대상 물질조차 측정에서 누락되는 사례가 발견되는 등 작업환경측정 제도의 불완전한 점을 지적했다.

또 에폭시 수지 등 고분자 물질이 고온으로 가열되거나 자외선 등을 받게 되면 벤젠, 포름알데히드 같은 발암물질을 반응부산물로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 전동차 중정비 업무를 수행하던 한 근로자는 벤젠에 지속 노출돼 이씨와 동일 질병에 걸려 업무 관련성을 인정받은 2015년 사례도 있다.

특히 반올림에 따르면 서울반도체 인사팀장은 올해 2월 이씨 사망 전 집에 찾아와 산재 취소소송 진행을 알려 유가족에 심적 고통을 안겼다. 이씨가 병원에서 퇴원한 지 사흘째 되던 날이다. 산재 인정으로 치료비 부담을 덜 수 있던 가족은 회사의 처사에 반발, 반올림도 서울반도체에 공문을 보내 산재 취소소송 취하를 요청하기도 했다.

반올림은 “반도체 직업병에 대한 대법원 판례를 보면 개별 유해요인에 대한 노출 수준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개별 유해요인들이 특정 질환의 발병이나 악화에 복합적·누적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했다.

또 “첨단산업의 특성상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위험성과 직업병과의 인과관계에 대한 과학적 규명이 부족한 상황을 감안해 업무와 질병 사이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는 점도 강조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반도체 대표이사와 관계자들은 이씨가 사망한 다음날인 지난 9일 고인의 빈소를 찾았다. 유가족은 회사의 소송 취하 답변이 있을 때까지 장례를 미룰 각오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불확실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첨단산업에서는 산재가 본래 목적 및 기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는 게 반올림 측 시각이다. 반올림은 “12년 반올림 활동에서도 이번 사건처럼 악질적인 사례는 없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저작권자 © 월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