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총수 법정구속에 충격…후폭풍 주목
한국 경제 이끈 오너경영 '비상등' 켜지나
'대기업 때리기'에 투자위축·고용축소 우려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후폭풍이 몰아치면서 대기업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민주화 바람이 본격화한 지난해 하반기 이후 재벌 계열사가 77곳이나 줄었고 투자 의욕이 꺾이면서 새해 들어 대기업 은행 대출마저 감소세로 돌아섰다. 특히 경제민주화가 ‘대기업때리기’로 변질돼 경영 위축이 심각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일부 대기업의 잘못된 거래 관행 등은 개선해야 하지만 자칫 쇠뿔 바로잡다 소 죽이는 ‘교각살우’의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해 12월 16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신규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 등을 골자로 하는 경제민주화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대기업 ‘회장님 리스크’ 좌불안석

지난달 31일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징역 4년의 실형이 선고되면서 재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올해 첫 대기업 총수의 경제범죄에 대한 법정구속 확정은 박근혜 당선인이 강조한 ‘경제민주화’의 신호탄이라는 분석이다.

당초 법조계 일각에서는 최 회장이 펀드 선급금을 사적으로 유용한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고 횡령 금액에 대한 변제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실형을 선고받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법원이 최 회장에 대한 판결을 통해 재벌개혁 의지를 드러내면서 재계에서는 이번 판결의 불똥이 튀지 않을까 염려하는 분위기다. 법원은 지난해 2월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을 법정구속하고 8월에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대해 징역 4년을 선고하는 등 강경책을 고수하고 있다.

경제단체들은 최 회장의 판결에 대해 일제히 유감을 표명했다. 이날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최 회장은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기업경영뿐 아니라 사회적 기업활성화 등 우리 경제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며 “이번 판결을 계기로 최근 사회 일부에서 일어나는 반기업 정서가 확산되지 않을까 우려한다”고 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 역시 “대·내외 경제환경이 어렵고 수출과 내수회복이 절실한 상황에서 실형을 선고받아 안타깝다”며 “이번 판결로 그룹에서 진행해 온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 기업 활동과 지배구조 개선 작업들이 영향을 받을까 우려된다”고 강조했다.

이번 판결에는 경제민주화 바람이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그동안 경제에 미치는 파장과 국내 경제 발전에 기여한 점을 고려해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던 것과는 달리 반(反)대기업 정서와 맞물려 구속이 진행됐다는 것이다.

게다가 박 당선인은 공약에서 횡령이 집행유예가 불가능하도록 형량을 강화하겠다고 밝혀 추후 재판에도 냉엄한 법집행이 예고됐다. 박 당선인은 지난 1월 29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업무보고 자리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나오지 않도록 사회지도층 범죄에 대한 공정한 법 집행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SK에너지 울산공장에서 석유제품이 해외로 수출되기 위해 유조선에 선적되고 있다. SK그룹은 지난해 600억 달러의 수출을 달성하며 한국 경제에 기여했다.
대기업 경쟁력 하락 불가피…한국경제 ‘빨간불’

법원의 ‘재벌 봐주기’ 관행에 제동이 걸린 것에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지만 대기업 오너의 구속에 따른 경영공백과 국가 경쟁력 하락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CEO스코어가 지난해 오너 구속이나 검찰조사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SK, 한화, LIG, 태광 등 4개 그룹 계열 상장사의 3분기 누적 실적을 조사한 결과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최고 90%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적이 급감한 곳은 태광으로 흥국화재해상보험과 태광산업, 대한화섬 등 3개 상장사의 3분기 누적 영업이익이 347억원으로 2011년 대비 89.8%나 감소했다.

SK그룹도 모두 17개 상장사의 영업이익이 반토막 났다. SK그룹의 17개 상장사의 3분기 영업익은 7조29억원으로 2011년 13조3312억원에 비해 47.5%나 뒷걸음질쳤다.

이들 기업들의 경영 리스크는 분명해 보인다. 국내 대기업의 특성상 오너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일반 시설 투자는 몰라도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한 연구개발(R&D)에 투자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SK그룹이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전기자동차 배터리 사업, SK하이닉스 반도체사업 투자 등은 일정기간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화도 장기간 공을 들여온 9조원 규모의 이라크 신도시 건설이나 동남아시아 태양광 사업 및 생명보험업 진출 등에 비상이 걸렸다.

경제민주화에 따른 대기업의 투자 감소와 경쟁력 하락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경제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 작년 하반기 이후 재벌 계열사가 대폭 줄었고 새해 들어 대기업 은행 대출마저 감소하는 추세다.

공정거래위원회는 1월 중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대기업 집단) 62개의 소속회사 수가 1774개로 전달보다 17개 감소했다고 지난 4일 밝혔다. 대기업 집단 소속사는 지난해 10월 -16개, 11월 -29개, 12월 -11개에 이어 4개월 연속 줄고 있다. 이는 지난해 6월 말 1851곳에 비해 77곳이 줄어든 것이다.

계열사 축소는 대기업이 경기침체에 대비해 몸집을 줄인 것도 있지만 새 정부와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요구에 투자 심리가 꺾인 측면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공정위는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가 발견되면 피해액의 10배를 배상하는 방안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보고했고 대기업의 부당행위를 감시하는 전담조직 신설도 검토 중이다.

한화그룹 계열사 사장들과 직원들이 지난 4일 서울 신당동 유락종합사회복지관에서 만두빚기 등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한화는 지난달 27일 비정규직 2043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한화 제공.
대기업만 규제 형평성 어긋나

최근 대기업 오너 구속과 관련해 반기업 정서가 커지면서 기업 경쟁력은 물론 국가 경쟁력마저 낮아지고 있다. 특히 대기업에만 온갖 규제를 들이대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전경련은 지난해 8월 ‘대기업 규제 현황’을 조사한 결과 대기업은 자산, 종업원 수, 매출액, 점포크기 등을 근거로 34개 법령에서 84개의 규제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대기업 규제가 가장 많은 법률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로 18건에 달했다.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이 8건으로 그 뒤를 이었고 상법상 규제도 7건으로 조사됐다.

세계경제포럼(WEF)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2011년 ‘정부규제 부담’ 순위는 조사대상 142개국 중 117위로 3년 연속 하락했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기업관련 법규’ 순위도 지난해 42위로 조사대상 59개국 중 하위권에 머무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경련은 “최근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으로 대기업 규제가 강화되는 분위기인데 유럽발 금융위기 등으로 한국경제의 미래가 불투명한 현 상황을 고려할 때 대기업의 투자를 활성화해 일자리를 늘리려면 대기업 규제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완화·개선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경제전문가들은 대기업 오너 경영에 대한 편견이 한국 경제 발전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 기업전문가는 “흔히 황제 경영이라고 비판하는 국내 대기업의 오너 경영은 자동차나 반도체 등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해 성공으로 이끌기도 했다”며 “기업의 지배구조는 장단점이 함께 나타나는데 오너 경영의 단점만 부각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국이 글로벌 경기 침체에서 먼저 벗어나려면 대기업의 경제활동 위축이 아니라 대·중소기업의 동반성장 정책이 우선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다른 전문가는 “요즘 정치권에서 진행되는 경제민주화는 마치 대기업 때리기가 목적이 된 것처럼 보인다”며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동반성장하는 방법이 필요하지 중소기업 육성한다며 대기업을 끌어내리는 정책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활성화’가 우선…경제민주화 속도 조절해야

일각에서는 대기업이 국내 경제를 이끌어온 공이 확실한 만큼 편견을 갖고 나쁘게만 보면 안 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지난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한 후 50년간 대기업이 한국 경제 성장을 견인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만큼 대기업에만 부와 특혜가 집중된다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화그룹은 김종희 선대회장이 1952년 한국전쟁 당시 맨손으로 한국화약을 창립한 이후, 1981년 한화그룹을 총자산 7548억원, 매출액 1조1079억 원에 달하는 10대 그룹으로 성장시키며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김승연 회장 역시 2대 회장으로 취임한 뒤 한양화학 등 굵직한 인수합병을 성공하고 태양광·이라크 신도시 사업 등을 진두지휘하며 한화그룹을 자산 100조원이 넘는 기업으로 육성했다.

SK그룹은 창업주인 최종건 회장이 전쟁 후 폐허에서 선경직물을 설립해 국내 첫 직물 수출을 일궈냈고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국내에서 석유제품을 수출 1위 품목에 올려놓는 등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경영능력을 보였다. SK그룹은 지난해 세계적인 불황에도 사상 최대 규모인 600억 달러(한화 약 64조2000억원)의 수출실적을 달성하며 국가 전체 수출의 10% 이상을 책임졌다.

박근혜 당선인이 경제민주화와 함께 새 정부의 주요 과제로 지목한 일자리 확보를 위해서도 경제활성화가 선행돼야 한다. 경제활성화를 위해서는 경영활동을 위축시키는 일방적인 대기업 규제는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종사자 300인 이상 기업의 취업자는 204만5000명으로 전년에 비해 2.8% 늘었다. 이는 1∼4인(2.3%), 5∼299인(1.3%) 규모의 기업들보다 높은 증가율로 지난해 불경기에도 대기업들이 고용을 적극 늘린 결과다. 한화그룹은 지난달 27일 비정규직 직원 2043명을 정규직으로 일괄 전환하며 비정규직 문제 해소에 앞장서기도 했다.

올해는 경기 침체로 기업들의 일자리 창출과 투자가 지난해보다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경제민주화 정책이 이를 가속화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정책 시행의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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