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화이트리스트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

김승호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이 지난 22일 오후 스위스 제나바 WTO 일반이사회 참석차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 실장은 이번 이사회에서 일본의 수출 규제조치가 WTO 규범에 맞지 않는 부당한 조치임을 알릴 예정이다./사진=뉴시스

[월요신문=안유리나 기자] 수출 규제 조치를 둘러싸고 한·일 양국이 WTO(세계무역기구) 160여 회원국 대표 앞에서 격돌한다. 

세계무역기구 WTO의 일반이사회가 2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가운데 우리 측의 요청에 따라 일본의 수출규제 문제가 정식 의제로 논의된다. 전체 14개 의제 가운데 11번째 의제다. 정부는 WTO 통상 현안의 책임자인 김승호 산업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을 파견하고 대응에 나섰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김 실장은 WTO에서 심리한 한일 수산물 분쟁을 승리로 이끄는 등 이른바 '통상통'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김승호 실장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본 조치가 얼마나 위험하고 심각한 것인지 WTO회원국이 잘 알 수 있도록 쉬운 표현으로 잘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구속력 있는 결론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WTO 정식 제소를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명분을 확보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일본 측 역시 통상 업무를 담당하는 외무성의 경제국장을 파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日 2차 무역보복 바짝 긴장 

양측의 팽팽한 설전이 예상되는 가운데 재계가 일본의 2차 무역보복 가능성이 커지면서 긴장의 고삐를 조이고 있다. 국내 산업 생태계에서 일본의 영향이 적지 않은 만큼 제재가 실행되면 만만치 않은 후폭풍이 불어올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우선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되면 일본이 수출절차를 간소화해주던 혜택이 없어진다. 현재 일본 정부는 미국과 영국 등 27개국을 화이트리스트에 올려놓은 상태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유일하다. 일본은 화이트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방안에 대해 24일까지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음달 중 관련 법 규정을 수정할 계획이다.

현재로써는 화이트리스트 제외로 그 범위가 더욱 확대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보기술(IT)은 물론,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기업의 몫으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한국 무역협회에 따르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될 경우 850개 가량의 전략수출 품목이 규제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기업들은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외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한일 양국의 정치적 갈등이 쉽게 봉합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장기전의 가능성도 점차 확대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에 따라 5개 경제단체 부회장단은 이날 오전 서울 서초구 사평대로 쉐라톤 서울 팔래스호텔에서 가진 조찬 회동에서 국내 산업계에 일본 수출 규제가 가져올 여파에 대한 우려를 쏟아냈다. 이날 조찬 회동은 5개 경제단체가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경제정책 협의 간담회의 일환이며 비공개로 진행됐다. 오전 7시 30분부터 1시간 30분가량 진행된 조찬 회동은 일본 경제보복 조치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일부 소재와 부품의 경우 일본산을 대체하기 어려운 만큼 진통도 불가피하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들 5개 경제단체는 일본 경제산업성에 제출한 의견서를 통해 “일본 정부의 대(對) 한국 수출규제 조치가 부당하며 미래 지향적 한·일 우호 관계 구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결국 서로 피해를 입게된다"라며 "한국과 일본이 지난 60년 넘게 분업과 특화를 통해 상호 보완적인 산업 및 무역구조를 형성하고 글로벌 밸류 체인의 핵심 국가로 성장했다. 그동안 쌓아온 귀중하고 값진 양국의 우호적 신뢰관계가 손상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 일을 계기로  한·일 기업인들이 더욱 협력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도 이번 진통을 국내 산업 시스템의 체질 개선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또 다른 기업 관계자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산업 소재와 핵심 부품에 대한 특정 국가 의존도를 점진적으로 줄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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