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숲] 숲은 나무 한 그루에서 시작됩니다. 어떤 의미에선 사람도 나무와 비슷합니다. 혼자였던 마음이 누군가를 만나 결합할 때 그것이 ‘삶’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박윤미 기자의 작은 숲’은 연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타인을 위해 기꺼이 가진 것을 내어주는 사람들, 그것을 희생이 아닌 사랑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주인공 입니다. 그들이 일궈낸 [작은 숲]을 통해 독자 여러분 가슴에도 푸른 나무가 자라길 희망합니다.
“그냥 하는 거예요. 대단한 사명감 가지고 하는 거 아니예요.”
'남편', '아버지', 그리고 소싯적 범인 제일 잘 잡던 '경찰'. 김윤석(63) 씨 삶을 증명하는 이름들이다. 누군가는 그를 이렇게도 부른다. “참 고마운 양반”.
김윤석 씨는 강서경찰서, 영등포경찰서, 광수대 등을 거쳐 마포경찰서에서 경감 직위를 끝으로 은퇴한 경찰이다. 이제 60대 초반의 안온한 노년을 보장 받아도 될 나이에 이르렀지만, 그는 여전히 현장에 서 있다.
김윤석 씨(이하 김 경감)는 스물 일곱 살부터 평생을 경찰로 살았다. 일은 적성에 잘 맞았다. 그만큼 살인범과 강도, 장물범 등을 열심히 쫒아 다녔다. 피의자 검거율도 높았다. 덕분에 남들보다 승진도 빨랐다.
그런 김 경감의 머리에는 이제 흰 서리가 잔뜩 내려앉았고, 체력은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인생 2막에도 현장은 남아 있다. 다만 그가 잡는 것은 더 이상 범인이 아닐 뿐.
김 경감을 만난 지난 17일은 ‘쪽방도우미봉사회’의 월동 준비가 막 시작되는 날이었다. 김 경감을 비롯한 이곳 봉사자들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강원도 평창에서 출발한 배추들을 내려야 하는 일 때문이다. 김 경장은 이날 배추 자루를 손에 쥔 상태로 인터뷰에 응했다.
봉사회는 올해 8000포기 김장을 계획했다. 800포기도 가늠하기 어려운데, 8000포기라니. 같이 밥을 먹는 '식구(食口)'가 얼마나 많은 걸까.
'쪽방도우미봉사회(조계사 붓다맘봉사단)'는 불교신자인 김윤석 경감이 지난 1999년 영등포경찰서로 발령을 받으면서 태동한 단체다.
그리고 형편이 넉넉치 않은 쪽방촌 주민과 노숙인 등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 점심을 나눠주는 일에 마음 따뜻한 사람들의 뜻과 행동이 모여 시작된 것이 바로 이 봉사회의 대표적인 일 ‘국수공양’이다.
국수공양은 일주일에 하루 매주 목요일 이뤄진다. 보통 날은 400명 가량 찾아오는데, 올해 추석에는 1000명이나 줄을 설 만큼 찾는 사람이 많다.
"지하철 다니는 곳이면 멀리서도 오세요. 부천, 부평, 어떤 분은 의정부에서도 오셨더라고요. 그들에게는 생존이니까 거리가 먼 것 쯤은 상관 없는 거예요. 어떻게든 배는 채워야 하니까."
봉사회의 국수공양은 코로나19 팬데믹 때도 멈추지 않았다. 전염병은 배 곯는 이들을 외면하게 만드는 힘까지는 확산하지 못했다. 다만 방식은 달랐다. 도시락으로 국수공양을 대신했다. 쪽방촌 주민들에게는 마스크와 소독제, 과자와 음료들도 건넸다.
“코로나 때는 무료 배식하는 곳들도 문을 닫아 버리니 쪽방촌 주민들이나 노숙인들은 더욱 힘들었죠. 하루 한 끼 먹어야 잘 먹었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그마저도 없으니 얼마나 배가 더 고팠겠어요.”
‘쪽방도우미봉사회’는 정부 지원금 한 푼 없이 20년 이상을 버텼다. 봉사회의 뜻에 마음을 모은 개인과 단체의 후원과 자원봉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달걀을 한 트럭 보내주는 사람, 육수 낼 때 쓰라며 북어 대가리와 멸치 등을 십 수년 후원하는 이도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인데, 계속해서 북어 대가리를 보내주시더라고요. 한 번은 전화 할 일이 있었는데 후원자의 따님이 받으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봉사회에 계속해서 북어 대가리를 보내라’는 유언을 남기셨다고요. 이후로도 계속해서 북어랑 멸치 같은 것들을 보내주시는데, 이런 분들 생각하면 이 일 멈출 수가 없죠."
김 경감의 봉사는 1990년 시작됐다. 마포구 아현2동파출소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밤, 잔뜩 취한 남성이 그를 붙잡고 털어놓은 “나는 삼동소년촌 출신인데, 고아로 자라 너무 외롭다”는 주정이 김 경감의 마음에 불씨가 됐다.
홀린 듯 찾아간 삼동소년촌은 1953년 한국전쟁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세워진 곳으로, 부모의 돌봄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이후 김 경감은 별도로 시간을 내 삼동소년촌을 방문했다. 그런 그가 그곳 아이들을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이들을 순찰차에 태워 동네를 한 바퀴 돈 것이었다. 그 작은 경험에 아이들은 소리 내 웃었고, 김 경감이 있건 없건 경찰차만 보면 손을 흔들 만큼 곁을 내주기 시작했다.
그의 활동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그를 아는 이들이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동대문에서 장사하는 상인은 옷가지를, 문구점 하는 또 다른 상인은 장난감을 후원했다. 한 독지가는 중고 컴퓨터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점점 늘었다.
그런 그의 눈에 또 다른 이들이 들어온 것은 1999년. 영등포서로 발령을 받으면서다. 범죄 예방을 위한 순찰 중, 그는 다리 밑에서 밤을 지새우는 노숙인과 부랑자 등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었다.
“주민번호도 없이 그냥 다리 밑에서 먹고 자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살아 있는 국민’이라는 건 증명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주민등록증 발급부터 도왔습니다. 정부 지원도 받게 해주고요."
김 경감은 이후 근무지 옥상에 간이 주방을 만들고, 후원받은 식자재로 밥을 짓고 국수를 끓여 배고픈 이들에게 나눠 주기 시작했다. 그것이 지금 봉사회의 시작이 됐다.
어떤 사람들은 봉사회의 배식 봉사를 못마땅해 하기도 한다. “일도 안 하고 대낮부터 술 마시는 사람들한테 뭣하러 밥을 주느냐”, "멀쩡한 몸으로 일을 해야지 왜 빌어 먹냐"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 이들도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말들 후에 김윤석 씨는 조용히 말한다. “그분들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요.”
“대화해 보면 정말 일 하고 싶어도 몸이 아파 못 하는 분도 있고, 가족에게 버림 받아 실의에 빠져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은 분들도 많아요. 누군가는 이들이 못마땅하겠지만, 그렇다고 살아 있는 목숨인데 굶어서야 되겠습니까."
실제 쪽방촌 주민들과 그곳에서 노숙하는 이들의 삶은 녹록치 않아 보였다. 낡고 냄새나는 화장실과 부엌을 공유하며 딱 한 사람 누울 공간만큼의 방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누워만 사는 사람들. 꿈도 희망도 없이 텅 빈 눈동자로 TV만을 응시하는 사람들. 그래도 살아있는 그들. 이처럼 봉사회가 이른 아침부터 수천 포기 배추를 나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 경감은 몇 번이나 자신이 대단하다거나 특별한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 강조했다. 밥 먹으러 오는 사람들과 자신은 다를 게 없다고도 말했다.
"이 일은 제가 세상을 떠나거나 외국에 나가 살지 않는 이상 그만 둘 수가 없어요", "집 사람도 제가 집을 돌보기 보다는 너무 봉사에만 매달려 사니까 좋아하지 않죠. 그런데 어떡합니까. 배고파 오는 사람들이 있는 걸 아는데 어떻게 안 해요." 그래서 김 경장은 칼 바람이 부는 날에도,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날에도 집을 나선다.
"늘 식사하시러 오시던 분이 안 보이면 그게 또 그렇게 걱정이 돼요.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식사는 하셨는지", "봉사자들이 다 같은 마음이예요. 멀리 남양주에서부터 여기 영등포까지 오는 분도 있어요. 외국인도 봉사합니다. 우리 다 같은 마음이예요. 배 곯는 사람들 외면 하기가 어려운 거죠."
굴곡 많은 인생들이 잠시 모여 한 그릇 국수 앞에 마주 앉는 그 시간. 김 경감의 말대로라면 그저 “내 배가 부르고, 내가 행복하고 편한 시간"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다시 살아볼 힘을 아주 조금이라도 건네받는 시간일지 모른다. / 월요신문=박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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