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숲] 숲은 나무 한 그루에서 시작됩니다. 어떤 의미에선 사람도 나무와 비슷합니다. 혼자였던 마음이 누군가를 만나 결합할 때 그것이 ‘삶’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박윤미 기자의 작은 숲’은 연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타인을 위해 기꺼이 가진 것을 내어주는 사람들, 그것을 희생이 아닌 사랑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주인공 입니다. 그들이 일궈낸 [작은 숲]을 통해 독자 여러분 가슴에도 푸른 나무가 자라길 희망합니다.
검은 머리카락보다 흰 머리카락이 좀 더 많은 60대 남자. 그 남자가 그린 어린왕자는 제주도에서 본 어느 바다의 짙푸른 파랑을 닮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다. 그는 말했다. “기자님, 난요, 막 하늘을 날고 싶어.”
그는 이어 이런 말을 했다.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갓 결혼하고 나서 신혼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나 봐요”라고. 실제로 그가 그린 그림들에는 보는 사람도 덩달아 행복해 지는 기운이 담겨 있다.
탁용준(64) 작가는 지난 6월과 이번 9월 ‘세상의 모든 경계를 넘어’를 주제로 한 ‘Beyond the Border' 전시회에 참여했다. 한 번은 목동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성동에서다. 두 번의 전시회에 탁 작가는 ’어린왕자‘를 주제로 한 작품들만을 펼쳐 보였다.
그의 그림 속 어린왕자는 우리가 생텍쥐페리의 소설 속에서 만난 어린왕자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어린왕자는 사막에 앉은 어린왕자가 아닌 하늘을 나는 소년, 혼자가 아닌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거나 누군가를 향하는 소년이다.
“난요, 다른 그림도 그리지만, 어린왕자를 그릴 때가 제일 좋아요.” “어느 분이 제 그림을 보시곤, 제 정신세계가 20대에 머물러 있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맞는 말씀이신 게, 제 생각에도 아내와 연애하던 시기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린왕자를 그릴 때도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인 순간을 그리려고 하는 것 같아요.”
탁 화가는 신혼생활이 한창 꽃 필 무렵이던 결혼 8개월 차에 수영장에서의 뜻하지 않던 사고로 경추를 크게 다치며 스스로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이 됐다. 삶이 행복으로 무르익을 때 들이닥친 몹쓸 불행이었다. 때는 1989년 7월 여름이었고, 그의 나이 불과 스물아홉이었다.
그런 중에도 쨍하고 드는 한줄기 빛은 있었으니, 그들 부부에게서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우리 아들이 벌써 서른다섯이예요. 내가 그림 그린 지 30년이 됐고요. 그 아이를 제가 공부 시켰어요. 아이를 옆에 두고 매일 동화책을 읽어줬거든요. 아들은 가끔 그 이야기를 해요. 아빠가 동화책 읽어줬을 때 좋았다고. 아들도 아들이지만, 그 시절의 동화들이 제 그림의 베이스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저는 요즘에도 동요를 자주 들어요.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죠.”
사실 탁 화가는 사고 이후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의지를 바로 갖지 못했다고 한다. 많은 중도 장애인이 그러하듯, 좌절했고 비관했다. 갓 시집온 아내에게, 막 태어난 아들에게 가장으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당장 자신부터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담당 의사는 “평생 누워 지낼 것”이라며 사망 선고 못지않은 말로 탁 화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을까. 독일에서 공부한 담당 의사는 탁 화가를 응급실에서 곧바로 재활병원으로 옮길 수 있게 했다. 당시엔 드문 일이었다. 덕분에 탁 화가는 삶을 이어나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장애인의 몸에 맞춰 하나하나 배워 나가기 시작했다. 신혼을 마음껏 누려야 할 아내는 당시 만삭의 몸으로 곁에서 도우며 함께 삶을 지탱하는 셰르파 역할을 도맡았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탁 작가는 병원에서 구필화가 김기철 화백을 만나 미술을 권유 받게 됐다. 그렇게 탁 화가는, 가장 어두운 곳에서 어쩌면 다신 없을 줄 알았던 가장 밝은 빛을 마주하게 된다.
처음에는 붓을 입에 물고 그림을 시작했다. 하지만 미약하나마 팔에 남아 있는 힘을 이용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손에 보조기를 낀 채 붓을 껴 선을 그었다. 긋고 또 그었다. 그렇게 그림을 완성시켜 나갔다. 한 장 한 장의 도화지를 채워 나간 삶이 어느덧 30년이 된 것이다.
현재 탁용준 화가의 삶은 그동안 그가 세상에 내놓은 그의 그림이 궤적이 돼 증명하고 있다. 대한민국 기독미술대전, 곰두리 미술대전, 장애인문화예술국민대축제 등 유수의 미술상을 수상한 것은 물론,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에 2015년 국민추천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사고가 일어났던 해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평생 아내에게 민폐가 되지는 않을지, 쑥쑥 커가는 아들을 보면서 ‘내가 저 애에게 짐이 되지는 않을까’ 고민하던 때에는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던 사치스러운 고민이었다.
하지만 지금, 탁 화가는 그림 좀 볼 줄 안다는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한 화가가 됐고, 전시회마다 작품들을 솔드아웃 시키고 있다. 이뿐인가,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 위해 특별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책도 내고, 캘린더도 만든다.
하지만 탁 화가는 이러한 왕성한 활동 중에도 남들 모르는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의사가 그러더라구요. 징징대면 주변 사람들이 지친다고. 가족도 지치고, 친구들도 지친다고. 그럼 다들 떠나니까 징징대지 말라고. 정 아프면, 정신 멀쩡하니까 병원 가서 약 타서 먹으라고 그러대요. 그래서 요즘도 매일 고통을 좀 줄여주는 약을 먹어요. 근데 그것도 너무 센 걸 먹으면 정신이 몽롱해지니까 아파도 참으면서 지내고 그래요.”
탁 작가는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할 때는 1년에 120개 작품까지 그렸다고 한다. 이번 전시회를 앞두고는 7~8월 두 달간 여섯 점을 그렸다고. 유화 특성상 그리고 말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탓에 하나의 작품만을 붙들고 있을 수 없어서다. 그렇게 30년 동안 그의 손을 통해 탄생된 작품만 총 2000여 점. 자료로 남아 있는 작품의 수만 집계 결과 그렇다.
몸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사람이, 활동 보조인 없이는 소소한 일상조차 불가한 장애인이 평균 1년에 한 차례씩 30년간 30회의 개인전을 열 수 있었던 그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탁 화가는 말한다. “한때는 그리는 족족 그림이 팔리기도 했어요. 물감 값도 나오고 화실 비용도 나오고, 코로나 끝나고는 카니발도 한 대 샀어요. 좀 더 많이 움직이려고. 전동 휠체어 실리는”, “돌아가신 우리 장인어른이 제가 장애인 되고는 자기 딸 걱정을 얼마나 많이 했을 거야. 근데 제가 그림 그리고 전시회 열고 그림이 전부 팔렸다니까 너무 좋아하시는 거야. 돈 걱정이 왜 안 되셨겠어요.”
굳이 이 대목에서 ‘불가능의 가능’ 같은 뻔한 말은 아니어도 좋다. 탁 화가 또한 그런 말로 자신의 지나온 길을 한 줄 요약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살아내 온 자신의 삶이 그러했다는 것. 살아 보니 살아졌다는 것을 말한 것이리라.
탁용준 화백은 인터뷰 중 관객으로부터 작은 꽃다발을 선물 받았다. 그의 곁에 있던 활동보조인은 그 꽃다발을 그의 허리춤에 끼웠다. 그간 수없이 많은 꽃을 받았을 텐데도 그는 말간 웃음을 보였다. 그의 바람대로 그는 아직 ‘순수’를 ‘동화’를 간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탁 화가는 세월호 당시부터 매월 카카오톡에 저장된 지인들에게 새달 인사를 보내고 있다. 받는 이들만 400여 명이다. 한 번도 빼놓지 않고 해 오는 일이라고 한다. 왜 그렇게까지 열심인지를 묻자 그는 말한다.
“그냥 나는 사람이 좋아요. 다치기 전에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잖아요? 그러면 그걸 쭉 걸어놨었어요. 좋은 글과 그림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좋은 것을 주변의 사람과 나누는 사람. 자신의 장애를 앞세워 이해받기보다는 그저 그것을 찬찬히 극복해 나가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잔잔한 깨달음을 건네는 사람. 탁 화백이 지난 30년 2000여 개 작품을 통해 세상에 보여준 울림은 단순 동화가 아닌 ‘전래 동화’로 오래오래 세상에 이어져 나갈 것이 분명하다. / 월요신문=박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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