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신문=김기율 기자]기업의 최고경영자(CEO)는 각종 현안과 경영전략, 비전, 포부 등을 글과 말을 통해 자주 드러내곤 한다. 그 가운데 신년사는 지난해를 돌아보고 새해 나아갈 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은행권 CEO들은 최근 몇 년간 신년사를 통해 '디지털 전환'을 피력해왔다. 그러나 이들이 언급한 디지털 전환은 '해야 한다' 수준에 그쳤고, 은행의 디지털 사업 결과물은 '빛 좋은 개살구'라는 지적이 나오기까지 했다. 그동안 CEO들은 연례행사처럼 미래 성장 동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수단으로 디지털을 들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올해 신년사에도 어김없이 디지털 전환이 언급됐다. 그러나 그 단어가 갖는 무게는 사뭇 다르다. 은행권 CEO들은 '해야 한다'가 아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로 일제히 노선을 틀었다. '디지털 전쟁', '조직의 명운', '근본적 혁신', '변화의 쓰나미'. 올해 신년사에 포함된 CEO들의 멘트는 디지털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절박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절박함 밑에는 네이버와 카카오 등 빅테크 업체의 금융업 진출이 깔려있다. 지난 2017년 제1호 인터넷전문은행 '케이뱅크' 출범 당시만 해도 기존 은행권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그러나 제2호 인터넷전문은행 '카카오뱅크'의 폭발적 성장세는 은행권을 긴장시켰다. 이후 편의성을 내세운 빅테크 업체가 금융시장 파이를 넓혀나가며 은행권의 긴장은 공포로 변했다.

지난해 갑작스레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은행권의 공포를 더욱 증폭시켰다. 이제 언택트(Untact, 비대면)라는 말은 신조어가 아닌 일상이 됐다. 은행 점포를 방문하는 고객의 발길은 줄고, 스마트폰 화면 터치 몇 번으로 금융을 이용하려는 니즈는 늘었다. 특히 미래 고객층으로 꼽히는 MZ세대는 은행 영업점이 아닌 네이버와 카카오 등 플랫폼에서 상품을 주로 확인한다.

은행권 CEO들이 '금융 플랫폼' 구축에 열을 올리는 것도 이 같은 현상에 기인한다. 이들은 단순 기술력을 끌어올리는 디지털 전환이 아닌, 고객의 일상을 파고드는 디지털 전환을 위해서는 '플랫폼' 구축이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 은행권은 전담부서 신설과 외부인재 영입 등은 물론, 기존 보수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여행과 배달, 게임 등 타 산업과의 합종연횡까지 단행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단순 기능과 편의성 측면만 놓고 보더라도 빅테크 플랫폼에 비해 상당히 부족하다. 은행의 강점으로 꼽히는 금융소비자 신뢰와 방대한 고객 데이터는 이젠 옛말이 됐다. 은행 신뢰도는 사모펀드 사태로 추락했고, 빅테크가 보유한 고객 데이터는 수천만명에 달한다.

지난해 은행권은 과거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가시적인 디지털 전환 성과를 이뤘다. 이를 발판으로 빅테크와의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를, 가까운 미래에 은행이 단순 예금창구와 금융상품 판매처로 전락하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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