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순 한국 약선차 협회 부회장.
한병순 한국 약선차 협회 부회장.

한방(韓方)에서 흔히 듣는 진단 용어가 '어혈(瘀血)'이다. 인체 내의 혈액이 제대로 순환되지 못하고, 어느 일정한 국부에 혈액이 정지된 것을 가리킨다. '죽은피', 또는 '깨끗하지 못한 피'로 불리우는 그리 낯선 용어가 아니다. 어혈(瘀血)은 질병의 발전 과정에 형성된 병리산물인 동시에 또 다른 병을 일으키는 새로운 원인이 되고 있다. 어혈의 형성은 주로 두 개 방면의 원인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기허, 기체, 혈한, 혈열 등 내부적인 요인이고, 다른 하나는 각종 외상 혹은 내출혈 등 외부적인 요인으로 타박상과 교통사고 같은 것들이다. 양자는 모두 어혈을 형성한다.

조선시대 종로의 어느 한의원은 겨울이 되면 근처 길거리에 새벽녘 물을 뿌려 길을 얼려놓고, 보행자들이 미끄러져 타박상을 입게 함으로써 그 환자들로 하여금 큰돈을 벌었다는 농담 같은 일화가 있다. 며칠 동안 북극에서 밀려왔다는 차가운 공기로 한파가 극성을 부리고, 폭설까지 더해 온 길거리가 얼음판으로, 보행도 어렵고 운전하기도 난망하다. 이럴 때 모두에게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며, 타박상이나 교통사고로 인한 어혈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어혈의 형성은 여러 가지 외상(外傷), 즉 ▲각종 타박상과 경맥을 떠난 혈액이 체외로 배출되지 못하고 체내에 정지되어 생기는 출혈(出血), 운혈의 기능이 무력해 순환이 늦어지고 뭉치는 기허(氣虛) ▲기의 순행이 순조롭지 못해 혈행이 순조롭지 못할 때 형성되는 기체(氣滯) ▲혈은 열을 받으면 순행하고 한(寒)을 받으면 응결하는데 이 때의 혈한(血寒) ▲열이 왕성하면 혈액이 농축되고 맥외로 나와 머무르게 되는 혈열(血熱) ▲정서 상태와 생활규율의 실조로 기(氣)가 울체돼 혈액순환 장애로 나타나는 어혈 등이 있다.

이러한 어혈에 의한 발병의 특징을 보면 혈액의 정상적인 자양기능이 소실될 뿐만 아니라 전신 혹은 국부의 혈액 운행에 영향을 주어 동통, 출혈을 일으키며 경맥이 통하지 않으므로 내장에 징적(徵積)이 생기고 새로운 혈(血)의 생성에 영향을 준다. 어혈의 병증은 매우 복잡하나 임상에서의 공통된 특징은 아래의 몇 가지로 개괄할 수 있다.

'불통즉통(不通卽痛)'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며 부위가 고정돼 있고, 보통 낮에는 경하고 밤에는 중해지며 기일이 비교적 오래가는 동통(疼痛)과 어혈에 의한 종괴(물혹)로 부위가 고정돼 이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피부가 청자색 혹은 청황색을 띄며 누르면 아프고 흩어지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혈맥이 손상돼 맥외로 넘쳐나 출혈을 발생시키며 면부, 입술, 손톱이 청자색 혹은 암자색이 된다.

내상에 의한 어혈의 치료 방제로 시호(화해제, 한열왕래)6, 진피, 천궁(혈울), 향부자(기울), 지각(흉민, 加길경), 백작약(시호의 母) 각 4.5, 감초(止痛)3으로 구성되는 '시호소간산'이나 삼백차를 가감한 시호6, 백작약6, 백출6, 백복령6, 당귀6, 감초3, 생강2, 박하1로 구성된 '휘파람 불며 산책한다'는 의미의 '소요산'을 쓸 수 있다.

외상에 의한 어혈에는 넘어져서 팔이나 발목을 다쳤을 때 당귀미4, 적작약4, 오약4, 향부자4, 소목4, 홍화3, 도인3, 계심(계지)2, 감초2로 구성되는 '당귀수산(當歸鬚散)이나, 도인, 생지황 각 6g, 홍화, 당귀미, 천궁, 적작약 각 4g으로 구성되는 '도홍사물탕(桃紅四物湯)'을 쓴다. 도홍사물탕은 일체의 내외상의 어혈증(瘀血證)에 두루 쓸 수 있다.

미끄러 넘어져 골절이라도 되면 골수가 부족해지고, 골수가 부족해지면 척수가 부족해지며, 척수가 원만하지 못하면 뇌수가 결핍되어 치매가 오기 쉽다. 특히 나이 들수록 골절에 주의하여 건강하게 수명을 다 하자. / 한병순 한국 약선차 협회 부회장·서울교육대학교 평생교육원 생활한방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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